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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의 못 다한 꿈, 종전 선언
  • 익산투데이 편집부
  • 등록 2021-12-20 12:55:52
  • 수정 2021-12-20 13: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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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감독 정윤철

정윤철 감독.우리는 고대를 잘 모른다. 대부분의 소설과 사극 영화, 드라마 등도 거의 조선시대에 집중되어 있다. 


그나마 고구려는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무수한 갈등을 겪었기에 <연개소문>, <주몽>, <안시성>처럼 가끔 대하 사극드라마나 전쟁 액션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하지만 신라와 백제 관련 스토리는 가뭄에 콩나듯 한다. 


특히나, 고구려처럼 기백이 대륙적이거나 ‘국뽕’스럽지 않았던 백제는 661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덧없이 멸망한 후 조용히 잊혀졌다. 


계백과 5천 결사대, 그리고 의자왕과 3천 궁녀 등의 전설 같은 몇몇 장면만이 맥락 없는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 현재의 우리와 연관성 또한 거의 안 느껴진다. 


대부분의 학교 수학여행 코스 또한 경주와 불국사 등 신라 문화권 위주로 짜여 있어선지 남한 땅 서쪽 절반을 호령했던 백제는 국사 교과서의 암기항목 외에 직접 그 실체를 경험해볼 기회가 적었다. 


하지만 이번에 원광대 대안문화연구소 주최로 열린 <2021 문학인과 함께 하는 백제 역사 문화 탐방>을 통해 백제는 내 삶에 홀연히 걸어들어 왔다. 


그것도 공주나 부여 같은 백제 도읍지에 비해 생소했고, 그 의미와 역사성을 전혀 몰랐던 익산에서 말이다. 


물론 이 작은 도시 외곽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로 유명하기에 그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가서 그 탑을 보고 만지고 드넓은 절터를 밟으며, 누가 왜 변방의 익산에 당시 기술을 총동원해 드높은 석탑과 거대한 절을 세웠는지, 과연 어떤 이야기가 깃들여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자 백제라는 까마득한 고대국가가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히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미륵사지.그 스토리의 주인공은 바로 미륵사를 세운 백제의 무왕이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의 러브스토리로도 유명하지만 이 설화가 담긴 삼국유사 자체가 고려시대에 쓰여진 것이라 그 진위 여부는 사실 불분명하다. 


무왕이 살던 7세기 당시 백제는 나제 동맹으로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쳤으나, 이후 신라의 배신으로 뒤통수를 맞은 후 26대 성왕마저 관산성 전투에서 처참히 죽은 터라 백제 권력층의 신라에 대한 적의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에 익산에서 미천하게 살다가 귀족들에 의해 백제의 30대 왕으로 옹립된 무왕 또한 41년 재위 기간 내내 신라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귀족들을 단합해 미약했던 왕권을 강화하는데 노력한다. 


그리고 말년에 자신이 태어나 자랐던 고향 익산에 거대한 절 미륵사를 창건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석탑을 쌓아 국가의 정신적 지주로 삼음과 동시에 근처에 왕궁을 건설해 새로운 권력의 중심지로 만들려는 꿈을 품는다. 


하지만 참살된 성왕이 손수 천도했던 기존의 도읍지 부여에서 익산으로 수도를 옮기는 대역사는 권력층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고, 세상을 떠난 후 익산에 묻히며 그 한을 달랜다. 


이후 아들 의자왕이 왕권을 잡고 계속 신라와 적대 관계를 이루다가 결국 백제는 멸망하고 만다. 


자, 여기서 상상력을 한번 발휘해보자. 무왕은 대체 왜 거대한 절을 지은 후 수도를 천도하고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려 했을까? 어떤 세상을 꿈꿨기에 대체? 계속 상상력의 악셀을 힘껏 밟아본다. 


아다시피 무왕은 왕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성왕의 비극을 앞세운 주전파들에 휩싸여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다. 


신라는 할아버지 왕을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였기에 지금의 남과 북이 지닌 적대감 이상으로 상극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국가적 수치는 곧 지배층의 권력강화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되고 일종의 진영논리가 된다. 


말년의 무왕은 이런 갈등으로 인한 국력의 낭비와 백성들의 고통, 주전파 귀족들의 득세에 피로감을 느낀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성왕의 한풀이에 집착한 백제 권력층의 도그마를 깨고 왕권을 강화한 후, 적국 신라와 화해하여 태평성대를 꿈꿨던 것 아닐까. 


거대한 사찰과 왕궁을 재미삼아 짓지는 않았을 터, 대대적인 건축과 천도를 통해 무왕이 가슴에 품었던 이상은 분명 백제 사회의 변화였을 것이고, 과거와의 단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자비를 숭상하는 미륵사를 짓고 수도를 익산으로 옮겨, 참살된 성왕의 상징기호와 복수의 이데올로기가 넘치는 부여의 흔적을 지운 후, 철천지 원수 신라와의 ‘종전 선언’을 선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나도 살고 너도 살기 위해 서로를 인정하며 공존하는 자비로운 평화 세상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여기서 신라 공주와의 사랑이라는 미담 스토리도 태어난다. 


이것은 성왕 말년에 공개된 일급 비밀 실제 팩트일 수도 있지만, 신라와의 화평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조작된 가공의 스토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무왕은 죽었고, 상상은 여기서 끝이 난다. 


역사적 팩트는 그리고 계속해서 무심히 이어진다. 새로 등극한 아들 의자왕은 또다시 주전파들에게 휩싸여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곧바로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 전투에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을 죽여 성왕의 원수를 조금이나마 갚게 된다. 


허나, 이는 김춘추의 깊은 원한을 사게 되고, 위기감을 느낀 신라는 급기야 당과 군신관계까지 맺으며 굴욕적으로 동맹해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올인한다. 


결국 백제는 안타깝게 무너지고 연쇄적으로 고구려까지 침몰하지만 자력이 아닌 신라의 승리가 치룬 대가는 아다시피 너무나 커서, 고구려 영토 대부분이 중국에 넘어가게 된다. 


원통함도, 미련도 다 천년의 세월 속으로 이미 뿔뿔이 사라졌고, 절터는 폐허가 되었다. 


영겁의 시간을 견딘 채 홀로 외롭게 서 있는 미륵사지 석탑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돌무더기 속 깊숙한 곳에 무왕이 숨겨두었을지도 모를 평화와 공존의 사리함을 셀프 발굴해 보았다. 


물론 이것은 증명할 수 없는 추측과 상상에 불과하지만, 6.25 전쟁으로 발발한 동족상잔과 이념대립, 그리고 권력 유지 수단으로 악용되어온 적대적 남북 관계를 짊어진 현재의 한반도에서 결코 박물관 속에 보존될 과거의 유물만은 아닐 것이다. 


전후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종전선언’조차 못하고 있는 남과 북의 대립적 상황에서 일찍이 무왕이 익산에서 품었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또다시 되살아날 가치가 있다. 

그의 시대 이후 무려 천사백 년이 지났건만 왜 아직 여전히 동족끼리 진정한 평화와 공존을 못 이루고 있을까 하는 비통한 아쉬움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이스라엘의 대통령 시몬 페레스는 말했다. 


“기억의 반대는 망각이 아니라 상상이다”라고. 과거의 분노와 한은 억지로 잊을 수 없다.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로지 새로운 상상력뿐이다. 익산에서 잉태되었던 무왕의 오래된 상상과 꿈이 오늘날엔 반드시 이루어지길 두 손 모아 기대해 본다. 


정윤철이 걸어온 길

-1971년 생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졸업

-용인대학교 대학원 영화학과 졸업

-호주 국립영화학교 편집과정 이수

-1997  삼성영상사업단 주최 서울 단편 영화제 <기념촬영> 최우수 작품상

-2000  단편 영화 <동면> 클레르 몽 페랑 국제 단편 영화제 본선 경쟁

-2005  장편 <말아톤> (조승우 김미숙 주연) 감독 및 시나리오

-대종상 및 청룡 영화제 신인감독상, 시나리오상 수상

-도빌 아시아 영화제, 몬트리올 국제 영화제 본선 경쟁

-2006   문화체육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영화부문 수상

-2007  장편 <좋지아니한가> ( 김혜수 유아인 박해일 정유미 주연 ) 감독 및 각색

-2008  장편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황정민 전지현 주연) 감독 및 각색

-2014  장편 <그랜드 파더>(박근형 정진영 주연) 제작 

-2017  장편 <대립군> (이정재 여진구 김무열 주연) 감독 및 각색

-2020  MBC + 웨이브 제작 (문소리 이연희 이동휘 최시원 등 주연)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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