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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익산, 조급함에서 벗어나야
  • 익산투데이 편집부
  • 등록 2021-12-20 13:02:40
  • 수정 2021-12-20 1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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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성욱_사진가/다큐감독

익산브랜드 로고.올 여름 익산역 앞을 지나다 익산시 광고를 보게 됐다. 공사장 펜스를 뒤덮은 그 광고엔 ‘위대하고 경이로운 도시-어메이징 익산’이라고 적혀있었다. 


‘위대하고 경이롭다’는 것은 천년고도 유산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할 것이고, 한편으론 사람들이 추앙하는 도시가 되길 염원하는 익산시의 바람이 담기기도 했으리라. 


굳이 영어단어를 끌어와(AMAZING) 단어 한가운데 미륵사지석탑을 앉힌 것은 언뜻 생경하기도 했으나, 이내 어떤 절박함의 표현으로 이해되었다. 어쨌거나, 그 광고이미지가 주는 여운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 위대하고 경이로운 도시


최성욱 사진가/다큐감독 vjshot@naver.com.사진 찍는 일을 직업으로 둔 탓에 여러 지역을 오간다. 그 중에서도 전라남북도의 여러 도시들을 다니다보니, 각각의 지자체들이 강조하는 도시이미지를 자연스레 살피고 비교하게 된다. 


그 지역의 대표적인 명소와 특산품, 축제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역 홍보를 통해 이미지를 제고하고, 관광객을 불러들이려는 지자체의 노력은 눈물겹다.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젊은이들은 대도시로 떠나가는 오래된 산업화의 병폐 속에서 어떻게든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이목을 돌려보고자 절박하게 궁리한 결과물들이 도시 곳곳에 전시되고 있다. 


그 궁리 끝에 탄생한 결과물은 가끔씩 실소를 터뜨리게도 하고 분노를 부르기도 한다. 외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경우도 왕왕 발생한다.


한국 사람들에게 익산은 어떤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을까. 


‘익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미륵사지 석탑이다. 익산시의 브랜드로 석탑을 새겨 넣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닐 터이다. 


나의 경우엔 어릴적 보았던 사진 한 장이 그 시작이었다. 익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그 사진(한쪽 귀퉁이에 시멘트가 발라진 채 밭 한 구석에 쓸쓸이 서 있던) 말이다. 


그 한 장의 사진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정말이지 대단한 것이어서 나는 오랜 시간 그 폐허 같은 석탑을 동경했고 상상했었다. 


가끔은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매력적이다. 저 거대한 석탑을 세우기 위해 거대한 돌을 쪼고, 나르고, 쌓았을 이들의 수고로움을 상상하는 것으로 출발해, 이 절터에 도착해 문화재조사를 벌였을 일본인들의 속내를 짐작해보다가, 다시 해체보수와 발굴을 통해 광대한 절터의 흔적을 재현해놓은 문화재청의 의도까지를 헤아려보는 것이다. 


이 석탑의 존재를 둘러싸고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이어져온 숱한 이야기들. 연못 앞에 버티고 선 나무 그늘 밑에 서서 오랜 세월 이 곳을 다녀갔을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려보는 것은 더 없이 특별한 경험이다. 


그런데, 그 상상을 토대로 구현된 일러스트나 상상도는 때로 가슴 한 구석에 품고 있던 기대감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20년 만에 복원된 서탑을 처음 본 순간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탑을 복원하는 데 들어간 비용과 수고로움을 헤아리기 전에 먼저 가슴에 스며든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서운함과 생경함이었다. 


# 상상 속에서 더 멋진 미륵사지


탑을 보겠다고 일부러 익산을 찾아가는 이에게 정작 필요한 건 구체적인 형태와 물성이 아니라 기대감과 간절함, 그것 너머의 시간을 상상하는 즐거움이 아니었을까. 


석탑 주변을 몇 번이고 돌며 빛이 만들어내는 형태의 변화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부재들의 자리를 마음의 눈으로 이어 붙여보는 상상. 


동서남북 방위와 거리에 따라 각기 다른 매력이 느껴지는 이 특별한 절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것, 그 자체가 어쩌면 최고의 볼거리인지도 모른다. 


굳이 익산박물관에 전시된 사리장엄구를 보지 않더라도, 제 자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누워있는 부서진 돌덩어리에서 긴긴 세월이 남긴 무늬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올 여름 이곳에서 옛 미륵사지의 전설을 모티브로 한 미디어아트쇼가 열렸고 가을엔 서동축제가 열렸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니 이를 관광홍보에 활용하는 것이 당연하고, 한편으론 시민에 대한 봉사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미륵사지의 가치를 더욱 널리 알리고, 관심을 불러오기 위해 많은 이들의 수고가 있었으리라 짐작해본다.


# 성과중심의 도시브랜드화를 경계해야


문제는 조급함이다.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자체와 공공기관, 단체들은 제한된 예산과 시간의 압박을 피할 수 없다. 


성과중심의 압박과 유혹 앞에 당연히 노출될 수밖에 없다. 판에 박은 듯 똑같은 지역축제의 형식들과 다듬어지지 못한 일회성 행사들은 오랫동안 문제로 지적돼왔다. 


예를 들면 멀리 조명을 받아 빛나는 석탑을 바라보며 무대 앞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맥락 없는 트로트 곡에 맞춰 몸을 흔드는 관객들을 볼 때 느끼는 당황스러움이 그렇다. 


익산이 품은 이 멋진 석탑은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최고의 선물임이 틀림없다. 먼 길을 다녀오는 길에 고속도로 위에서 만나는 무등산이 광주에 사는 내게 주는 푸근한 느낌을 큰 선물이라 느끼는 것처럼, 익산 시민들에게 미륵사지 터는 왕궁리 유적과 더불어 큰 자부심일 것이다. 


역사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활용해 도시를 브랜딩 하는 일에 책임을 진 이들에게 조급하게 당장의 성과를 내기보다 긴 안목으로 누구나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만한 기획을 주문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첫머리에서 언급했던 ‘위대하고 경이로운 도시’는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익산의 쇠락해가는 시가지와 도시의 역사와는 아랑곳없이 건설되는 아파트들, 물난리가 난 재래시장과 그 속에서 고통 받는 시민들을 그대로 두고서는 그 슬로건은 공염불이 될 것이다. 


석탑이 복원공사를 마치고 일반에 공개된 후, 나는 꽤 여러 번 미륵사 터를 다녀왔다. 


올 가을엔 운 좋게 전문가의 해설도 들을 수가 있었다.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어느새 겨울이 돼서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들린다. 


이 글을 쓰며 뜻 맞는 몇몇 지인들과 눈 덮인 미륵사지를 걷는 상상을 해본다. 그 터에 다른 구조물이 더 들어서지 않아도 나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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