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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의 본고장’은 익산!, 우리가 모르는 것들(1)"
  • 최정호 기자
  • 등록 2022-07-29 13: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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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산시민이 반드시 알아야 할 문화유산과 과제 연속 연재
<익산투데이>는 익산근대문화연구소와 함께 익산시민의 문화의식 고양을 위하여 ‘익산시민이 반드시 알아야 할 문화유산들’ 코너를 신설한다. 총 20회에 걸쳐 익산시민이면 꼭 알아야 할 문화유산과 과제들을 소개하면서 익산시민의 자긍심 함양과 정체성 형성에 이바지하고자 한다./편집국


# 송흥록이 누구길래? 

이 그림은 평안감사의 부임 행사 풍경을 그린 ‘평양도10폭병풍(平壤圖十幅屛風)’ 중에서 오른쪽 하단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대동강의 능라도에서 명창(名唱) 모흥갑(牟興甲)이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춰 창을 하는 이 그림은 조선시대의 명창이 실명(實名)과 함께 소개되어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송흥록(宋興祿)을 가왕(歌王)으로 부르게 된 연유가 이 그림 속의 주인공인 모흥갑이 송흥록을 가왕이라고 추켜세우면서부터라고 한다. 



판소리는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이고 2003년 유네스코(UNESCO)가 세계무형유산[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한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리고 판소리가 세계무형유산으로 선정된 2003년에 전라북도 남원시는 1년 예산의 약 10%에 해당되는 200억 원을 국악(國樂)과 관련된 사업비로 편성했다. 이런 사실은 그만큼 남원시가 문화관광 분야에 투자하는 비중이 크고, 그 중에서도 특히 국악에 집중적인 투자를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한 노력의 결실로 남원시는 2002년부터 시작한 ‘국악의 성지’ 조성 사업을 2007년에 마치고 개관식을 가졌는데, ‘국악의 성지’는 남원 시내에서 자동차로 약 40분 동안이나 달려서 찾아가야 하는 운봉읍 비전길 69의 한적한 시골마을에 조성되었다. 그런데 남원시는 왜 이렇게 교통이 불편한 시골마을에 대규모의 예산을 편성해서 ‘국악의 성지’를 조성하게 되었을까?


남원시가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 조성한 송흥록ㆍ박초월 생가 및 송흥록ㆍ송광록 형제의 동상


그 이유는 ‘국악의 성지’에 조성된 국악선인(國樂先人) 묘역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이 묘역에는 당대의 가왕(歌王)으로 불렸던 송흥록(宋興祿)과 그의 아우 송광록(宋光祿), 그리고 송광록의 아들인 송우룡(宋雨龍, 1835~1897)과 송우룡의 아들인 송만갑(宋萬甲, 1865~1939)의 묘가 있다. 즉 우리나라 판소리 명창들의 가계(家系) 중 가장 저명한 송흥록의 가계가 이 비전마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 의도는 마을의 입구인 운봉읍 비전길 7에 새로 만들어놓은 송흥록ㆍ박초월 생가 및 송흥록ㆍ송광록 형제의 동상을 보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수백 년 세월 동안 수많은 명창들이 뜨고 졌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족적과 흥미로운 일화들을 많이 남긴 인물이 송흥록이기 때문에 남원시는 송흥록에게 통큰 투자를 한 것이다. 더욱이 송흥록의 아우인 송광록의 손자가 당대의 가왕(歌王)으로 불렸던 송만갑이니 이 정도면 카루소(Enrico Caruso, 1873~1921일)와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1935~2007)가 한 집안에서 나온 셈이다. 














왼쪽 이미지는 영화 ‘서편제’의 한 장면이다. 송흥록이 김성옥에게 전수받아 발전시킨 ‘진양조’는 판소리가 표현할 수 있는 극적 요소들을 더욱 섬세하고 풍부하게 해주는 기능을 하면서 새로운 유파를 파생시켰다. 박유전(朴裕全, 1835~1906)에 의해 발전하고 보급된 새로운 유파를 기존의 판소리와 구분하기 위해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 서편제인데,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편제(東便制), 서쪽은 서편제(西便制)로 나눠 부르게 된 것이다. 

오른쪽 사진은 여산[현재 망성면 미동마을] 태생인 정정렬 명창의 생전 모습이다. 익산시 남중동에서 거주하며 활동하다가 생을 마친 오정숙(吳貞淑, 1935~2008) 명창의 스승인 김연수(金演洙, 1907~1974)는 송광록의 손자이며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 이름을 떨친 송만갑에게 〈흥부가〉와 〈심청가〉를 전수받았고, 그 후에 다시 정정렬 명창에게 〈적벽가〉와 〈춘향가〉를 전수받았다.  


게다가 판소리의 역사에서 송흥록의 매형인 김성옥(金成玉)과 김성옥의 아들인 김정근(金定根) 그리고 김정근의 아들들인 김창룡(金昌龍, 1872~1935)ㆍ김창진(金昌鎭) 형제까지 가세시킨다면 송흥록의 가계는 아예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송흥록은 익산시의 인물이다.


송흥록의 출생과 사망에 관한 내용은-당시 재인(才人)들에 대한 기록의 대부분이 그렇듯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억측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내용이 바로 송흥록이 남원시(南原市) 운봉읍(雲峰邑) 태생이라는 것이다. 물론 송흥록이 한때 운봉에서 살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사실만으로 운봉에서 태어났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논리이다. 당시의 재인들은 자기가 태어난 고을에 계속 뿌리를 박고 사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활동 영역을 출생지와 동일시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의 타당성을 살펴보기 위해 우리나라 국악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몇몇 인물들의 예를 들어본다. 김성옥과 정춘풍(鄭春風)은 익산시 관내 지역인 여산(礪山)에서 활동하다가 여산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각각 강경과 공주 태생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신만엽(申萬葉)과 정정렬(丁貞烈, 1876~1938)은 여산에서 태어났지만 여산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익산군 삼기면 태생의 신쾌동(申快童, 1910~1977)은 여산에서 박학순(朴學順)과 백낙준(白樂俊)에게 가야금과 거문고를 배웠는데, 이처럼 옛날의 예능인들은 실력 있는 스승이 있는 곳을 찾아가서 공부한 뒤 계속 그 지역에서 머물러 활동하거나 더 큰 무대가 있는 지역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송흥록의 가계사(家系史)를 들여다보면 송흥록이 운봉 태생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말 송흥록이 운봉읍에서 태어났다면 송흥록의 부모가 운봉에서 거주했어야 하는데, 송흥록의 부친이 운봉에서 거주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기 때문이다. 송첨지로 불렸던 송흥록의 부친은 권삼득(權三得, 1771~1841) 명창의 수행고수(隨行鼓手)였기 때문에 권삼득의 활동 영역이 곧 송첨지의 활동 영역이 된다. 그런데 권삼득은 익산군에 거주하면서 익산과 전주를 무대로 활동하였고, 운봉읍에서 활동한 기록이나 구전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또 『익산시향토문화전자대전』의 내용에 의하면 권삼득의 처가(妻家)가 여산에 있었다고 하는데, 송첨지의 사위 즉 송흥록의 매형인 김성옥도 여산에 살면서 활동하다가 여산에서 생을 마쳤다. 이 사실은 송흥록의 누나가 여산에서 가까운 곳에서 출생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기록도 송흥록의 아우인 송광록이 함열현(咸悅縣)의 웅포(熊浦)에서 출생했다고 설명하고 있어서 송흥록이 운봉 출생이라는 주장을 무색하게 만든다. 


특히 송광록은 김성옥의 수행고수였으므로 김성옥이 사망할 때까지 여산에서 함께 살았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송흥록에 의해 완성되고 널리 보급되어졌다는 ‘진양조’도 여산에서 그의 매형인 송흥록에게 전수받은 것이므로 한때 여산은 권삼득ㆍ김성옥ㆍ송흥록ㆍ송광록 등의 명창들이 함께 활동하던 무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헌사료의 기록도 송흥록의 출생지가 익산시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남원시가 송흥록의 출생지를 운봉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정노식(鄭魯湜, 1891~1965)이 1932년에 펴낸 『조선창극사』에서 송흥록의 출생지를 운봉이라고 한 것과 1885년 안민영(安玟英)이 펴낸 『금옥총부(金玉叢部)』에 1842년에 당대의 명창들이 운봉의 송흥록 집에 모여 수십 일을 어울려 놀았다는 내용뿐이다. 


그런데 안민영의 기록은 한때 송흥록이 운봉에 살았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그곳에서 출생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또 조선창극사』에 송흥록이 운봉 태생이라고 쓴 정노식도 그 주장의 근거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정노식이 조선창극사를 쓰기 전에 미리 『익산군지(益山郡誌)』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면 그는 분명히 송흥록의 출생지를 함열(咸悅)의 웅포(熊浦)로 썼을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웅포면 입점리 산1번지에 송흥록의 묘소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바로 도로 건너 맞은편 구릉의 입점리 445-14번지에도 ‘송명창 묘’로 불리던 묘소가 있었다. 하지만 ‘송명창 묘’로 불리던 묘소는 그 언덕 정상부에 건물이 들어설 때 진입로를 내면서 파묘된 상태이다.


정노식이 쓴 『조선창극사』보다 8년 전에 펴낸 『익산군지[1932년판]』의 내용에 송흥록이 웅포 태생이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기록은 『함열구지(咸悅舊誌)』의 기록에 의거한 것이므로 함열 지역에서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송흥록의 출생지가 웅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웅포면에는 송흥록과 관련된 내용의 구전(口傳) 전승은 물론 송흥록의 묘로 알려진 무덤까지 남아 있다. 비록 비석도 없고 묘역을 돌보는 사람도 없어서 봉분마저 내려앉은 묵뫼가 됐지만 운봉의 비전마을처럼 인위적으로 조성한 무덤이 아니다. 웅포면 입점리 구룡마을에는 ‘송명창의 묘’로 불리는 무덤이 두 곳이나 있는데, 이렇게 송흥록이 사망한 후 매우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주민들이 ‘송명창의 묘’로 부른다는 것은 주민들이 송흥록의 존재를 꾸준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 ‘익산시는 ‘판소리의 본고장’이다.’ 2편은 오는 8월 15일에 연재됩니다.


글 쓴 사람 : 최정호, 익산근대문화연구소 회원

왕궁면지편찬위원회 위원, 여산지편찬위원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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