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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민이 반드시 알아야 할 문화유산과 과제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2-08-11 09:28:55
  • 수정 2022-08-11 09:5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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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양조의 발상지 ‘판소리의 본고장’ 익산(2)
<익산투데이>는 익산근대문화연구소와 함께 익산시민의 문화의식 고양을 위하여 ‘익산시민이 반드시 알아야 할 문화유산들’ 코너를 신설했다. 총 20회에 걸쳐 익산시민이면 꼭 알아야 할 문화유산과 과제들을 소개하면서 익산시민의 자긍심 함양과 정체성 형성에 이바지하고자 한다./편집국

 

# ‘진양조의 발상지’는 익산시이다 

 

공주의 박동진 판소리전수관 입구에는 김성옥(金成玉)ㆍ고수관(高壽寬)ㆍ정춘풍(鄭春風)ㆍ이동백(李東伯)ㆍ정정렬(丁貞烈) 순으로 명창들을 기리는 비석이 서있다. 이 중에서 김성옥과 정춘풍은 여산에서 활동하다가 여산에서 생을 마쳤고, 정정렬은 여산[현재 망성면]에서 출생했다. 또한 박동진 명창은 김성옥의 손자인 김창진(金昌鎭)과 정정렬의 제자이다. 결국 이 비석들은 익산시가 ‘판소리의 본고장’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웅변(雄辯)하고 있는 것이다.

 

익산시의 인물로 분류해야 맞지만 타 지역에서 그 지역의 인물로 주장하는 판소리 명창은 송흥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송흥록의 매부로 여산에서 활동하다가 여산에서 생을 마친 김성옥도 충청남도에서는 가치 있는 문화관광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다. 

충청남도는 공주에 국립국악원 분원(分院)을 유치하려고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여러 해 동안 추진하는 중인데, 그 근거가 되는 논리의 중심에 김성옥과 그의 후손들이 자리하고 있다. 진양조를 창시해서 송흥록에게 전수해주고 또 중고제를 발전시킨 김성옥과 그의 후손들이 충청남도 태생이라는 것이다. 또한 김성옥처럼 여산에서 활동하다가 여산에서 생을 마친 정춘풍도 충청남도 태생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여산에서 태어난 정정렬은 충청남도 태생인 박동진 명창의 스승이라는 이유로 그 논리에 가세시키고 있다. 

그런데 충청남도가 강경읍 태생이라고 주장하는 김성옥 역시 그 출생지가 분명치 않은데, 김성옥이 태어났다는 일끗리가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성옥이 태어났던 당시에는 강경포가 현재의 강경읍 지역이 아닌 강 건너편에 있었고, 현재의 강경읍 지역 대부분은 여산도호부 북일면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정말 김성옥이 강경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가 활동한 지역은 강경이 아닌 여산이기 때문에 진양조의 발상지를 충청남도로 주장하는 의도는 스토리텔링 구성과 여론 형성을 위한 전략적 판단에서 비롯된 강변(强辯)으로 보인다. 

 

1872년 지방지도를 보면 강경포가 현재의 강경읍이 아닌 강 건너편에 있었고, 나중에 현재의 강경읍 지역으로 이전해서 설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지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 남달랐던 호남의 손님맞이 

그렇다면 익산시는 어떻게 다른 지역들에 비해 월등한 국악(國樂) 관련 문화유산을 갖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익산시의 역사ㆍ문화적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익산시는 호남의 첫 고을로 조선시대에는 서울 이남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던 호남대로(湖南大路)가 통과하는 지역이었다. 더욱이 금강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육로와 수로가 두루 발달해서 상권(商圈)도 더불어 발달하게 되었고, 또한 군사적 요충지라는 지리적 위치를 갖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앞에서 보았던 ‘평양도10폭병풍(平壤圖十幅屛風)’을 참고해서 설명할 수 있는데, 평양이 조선 최고의 풍류도시가 된 배경도 평양의 지리적 위치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평양은 조선의 가장 중요한 도로였던 의주대로(義州大路)가 지나는 지역으로 중국과 조선의 사신들이 오가면서 머무는 곳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접대문화가 발달했다. 게다가 평안도는 항상 외적의 침입을 경계해야 했고, 또 내란이 종종 일어났던 지역이어서-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평안도에서 걷힌 세금은 조정에 상납하지 않고 평안도관찰사가 직권으로 처리할 수 있었으므로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물론 익산시 지역은 세금을 면제해주지는 않았지만 나랏일 때문에 오가는 관리들과 유력인사들을 접대해야 하는 일이 많다는 것은 평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남의 명주 ‘호산춘(壺山春)은 그 많은 손님들을 치러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만들게 되었다’는 당시 여산군수(礪山郡守) 송흠(宋欽, 1459~1547)의 기록이 그런 상황을 증언해준다. 또한 전라좌도(全羅左道)의 경시관(京試官: 과거시험 감독관)으로 1818년에 파견된 권복(權馥, 1769~1836)과 1874년에 파견된 한장석(韓章錫, 1832~1894)의 일기에 ‘충청도를 벗어나 전라도에 접어드니 대접하는 의식이 극진해지고 음식이 풍성해졌다’는 비슷한 내용의 기록이 있는 것도 접대문화가 발달된 지역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군영(軍營)과 풍류문화

이 외에도 익산시 지역에 국악과 관련된 문화가 발전하게 된 이유가 또 있다. 그것은 바로 여산에 전라도 5군영 중 후영(後營)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영(軍營)이 있는 곳에는 군악대인 취타대(吹打隊)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국악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게 되는데, 1687년 수군통제사 유중기(柳重起)에 의해 통제영(統制營)에 설치된 취고수청(吹鼓手廳) 악공들의 가면놀이가 ‘통영 5광대 놀이’로 발전된 사실은 그런 예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취타대보다 더 국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 고을 수령의 출신 성향이었다. 조선시대에 풍류문화는 문관(文官)들보다 무관(武官)들에 의해 향유되었는데, 여산의 수령인 도호부사(都護府使)는 후영장(後營將)을 겸한 직책이었기 때문에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가진 고위직 무관이 임명되었다. 

그래서 여산도호부사는 공주목사(公州牧使: 충청도관찰사 겸임)와 같은 품계를 가진 절충장군(折衝將軍: 정3품 당상관의 무관 품계)이 임명되었고, 한때 11개 군현(郡縣)의 군통수권(軍統帥權)을 행사했었을 만큼 그 권한이 컸기 때문에 여산은 물론 인근 고을들까지 문화적 파급력을 가질 수 있었다. 

더욱이 여산의 금강 연안(沿岸)은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국력을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그 교역항을 건설하자고 주장했던 세 곳의 후보지역 중 하나였고, 이태수(李泰壽, 1658~1724)가 대규모의 창고를 지어 8도의 군량미를 수송할 수 있게 하자고 주장했던 중요한 포구(浦口)들이 있던 지역이었다. 

이렇게 여산은 그 지리적 여건 및 군사 제도, 또 상업의 발달 덕분에 풍류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산은 권삼득의 처갓집이 되었고, 김성옥과 정춘풍을 이사하게 만들었고, 송흥록이 진양조를 전수받는 지역이 된 것이다. 

 

충청남도는 역량을 총동원해 국립국악원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당위성을 홍보하기 위한 명분으로 내세우는 판소리 명창들 중에는 공주시보다 오히려 익산시와 더 깊은 관련을 가진 인물들이 많다. [이미지 출처 : 공주시]

 

 

# 송흥록은 어떻게 남원시의 인물이 되었을까?

그런데 이렇게 좋은 여건을 가진 여산도호부를 두고 송흥록은 왜 운봉현으로 가게 된 것일까? 

그와 관련된 기록은 찾을 수가 없으므로 추론해볼 수밖에 없는데,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송흥록은 여산도호부사를 따라서 갔을 공산(公算)이 크다. 여산도호부사가 임기를 마치고 운봉현감(雲峰縣監)으로 가는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현감은 지방 수령으로서는 최하위 품계인 종6품직이기 때문에 정3품 당상관의 여산도호부사가 운봉현감으로 간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운봉현감은 전라도 5군영 중 좌영장(左營將)을 겸했기 때문에 여산도호부사와 같은 절충장군이 부임하는 관직이었고, 이웃 고을의 수령인 남원부사(南原府使: 종3품 품계)와 비교하면 2단계나 높은 관직이었다. 

그런데 정말 송흥록이 여산도호부사를 따라서 운봉현으로 갔다면 누구를 따라간 것일까? 이 역시 추론할 수밖에 없지만 짐작이 가는 인물은 있다. 1825년부터 1827년까지 여산도호부사로 재직했던 김견신(金見臣)이 1836년에 운봉현감으로 임명되었고, 그 시기는 여러 명창들이 운봉에서 송흥록과 어울려 놀았다고 기록된 1842년에서 그렇게 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송흥록은 김견신을 따라간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산후영장을 지낸 인물이 다른 지역으로 부임해서 그 지역의 문화에 영향을 끼친 다른 사례도 있으므로 그 가능성은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 1687년 통제영(統制營)에 취고수청(吹鼓手廳)을 설치해 ‘통영 5광대 놀이’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유중기(柳重起)도 1674년부터 1676년까지 여산후영장으로 재직했었기 때문이다. 

 


# 익산시여, 분발하자!

그런데 남원시가 인위적으로 송흥록 가계의 가묘(假墓)까지 만들고, 공주시는 김성옥 가계사의 스토리텔링을 구성해서 문화관광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는 그 긴 시간 동안 익산시는 무엇을 하였는가? 

익산시 관내에서 활동하거나 태어난 판소리 명창들은 권삼득ㆍ김성옥ㆍ송흥록ㆍ송광록ㆍ신만엽ㆍ정춘풍ㆍ정창업ㆍ정정렬 등등 대한민국의 그 어느 지역보다 더 많고 또 그 인물들이 판소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최고로 높은 편이다. 그리고 판소리뿐만 아니라 백낙준(白樂俊)ㆍ신쾌동(申快童)ㆍ윤윤석(尹允錫) 등 온 나라에 그 명성을 떨친 연주자들도 많다. 하지만 이들 인물들과 관련된 익산시의 문화사업은 겨우 ‘정정렬 추모음악제’ 하나뿐이다. 

이제부터라도 익산시는 이렇게 걸출한 명창들과 연주자들을 많이 배출한 익산시야말로 ‘판소리의 본고장’이며 진정한 ‘국악의 성지’임을 자신 있게 천명해야 한다. 

또한 익산시가 수백 년, 수천 년을 간직해온 그윽한 예향(藝香)으로 가득한 문화도시임을 세상에 널리 알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국악 관련 국가기관의 유치를 위한 노력을 경주(傾注)해서 소기(所期)의 성과는 아닐지라도 의미 있는 수확물을 얻어야 한다. 국악인들의 생가와 유적지를 복원해서 문화관광 자원으로 개발해야 한다. 국악과 관련된 전국적인 행사들을 더 자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남상일이나 송소희, 송가인 등 대중에게 인기 있는 국악인들을 초청해서 우리 지역의 문화사업에 큰 관심을 갖게 해야 한다. 우리 지역 국악인들의 역량을 키우는 교육사업을 지원하고, 혹시라도 우리 지역에 아직도 잠자고 있는 국악과 관련된 문화유산이 더 없는지 찾아보면서 아카이빙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또 시민들이 자주 찾는 공원들마다 국악과 관련된 상징물들을 설치하고, 시민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에 국악을 테마로 한 공원을 만들어서 우리 지역의 문화유산을 다른 지역이 함부로 강탈할 수 없게 해야 한다. 익산시민들의 문화적 자긍심을 한껏 드높여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글 쓴 사람 : 최정호
익산근대문화연구소 회원

왕궁면지편찬위원회 위원

여산지편찬위원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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