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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그리고 한국전쟁, 전재민과 피난민을 품은 ‘황등농원1’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2-11-11 09:38:45
  • 수정 2022-11-11 11: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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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규모 피난촌 황등 농원(農園)과 추억의 둥개 방죽
  • 주민·전문가 ‘황등 정착촌 토론회’, 22일 황등면사무소에서
‘익산, 해방과 한국전쟁의 전재민과 피난민을 품다’라는 주제의 ‘황등 정착촌 토론회’(이하 토론회)가 오는 22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황등주민행복센터 2층 주민회의실에서 개최된다.
이날 토론회에는 정헌율 익산시장의 축사와 함께 손인범 역사분과 대표, 한승진 황등중 교목, 신귀백 익산근대문화연구소장, 고갑순(황등초 동창회), 김수랑 후생 2구 이장, 김창만(정착농원 주민), 채수훈(왕궁면장) 왕궁면지 편찬위원장이 정착촌의 역사를 돌아보고 기록을 남기며 주민들의 실질적 문제해결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다.
이번 행사는 익산문화도시지원센터가 주최하고 익산근대문화연구소가 주관하며, 황등주민행복센터와 익산투데이가 후원한다. <익산투데이>는 오는 22일 ‘황등 정착촌 주민토론회’를 앞두고 이곳 주민과 전문가의 이야기를 5회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익산투데이>는 이번 행사와 관련하여 출향민들과 주민들의 고견을 기다리고 있다./편집국

                             주민들의 기억을 토대로 제작한 정착촌 반 지도(익산근대문화소연구원 최정호)


# 동네 이름은 ‘농원’…후생농원과 정착농원

우리 동네 이름은 농원(農園)입니다. 그 농원도 2개의 농원으로 불리는데 하나는 정착농원이고 또 하나는 후생(厚生)농원이죠. 후생농원은 해방 이후 해외에서 온 피난민들을 위해, 정착농원은 6,25 이후 내려온 피난민들을 위해 정부가 이곳에 정착하여 농사짓고 살라고 내 준 땅이랍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농원은 대규모 피난민촌이죠. 


농원은 죽촌리와 율촌리에 걸쳐있고 마을이 띄엄띄엄 19개 반으로 나뉘어 있었죠. 영숙이 동네는 15반, 우리 동네는 17반, 웅수네 동네는 11반, 이런 식으로요. 타 동네 사람들은 그 많은 반을 구별을 잘 못 하지만 우리 농원 사람들은 용케도 구별을 잘합니다. 지금은 반으로 불리지 않고 후생1, 2구 정착1, 2구로 불립니다. 아마 그동안 행정개편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암튼 어찌나 큰지 초등학교를 세 군데로 나뉘어 다녔습니다. 용산초등학교, 다송초등학교, 황등초등학교로요. 대부분 크고 좋은 황등초등학교로 다녔지만 일부는 다른 데를 다닌 사람도 있었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 농원 말고는 한 마을에서 3개 초등학교에 다니는 이런 일이 없었을 걸요. 그만큼 농원이 굉장히 넓었습니다.


황등초등학교보다는 다송이나 용산초등학교가 가까운 마을이 있답니다. 물론 황등초등학교가 크고 좋기에 멀어도 황등으로 다니는 학생이 훨씬 많았지만요. 피난민들은 맨몸으로 왔기 때문에 정말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해 대부분 성공해서 타지로 떠났지요. 용기 있고 진취적이고 개척정신이 있는 사람만이 피난을 왔기 때문인지 열심으로 억척으로 살아 성공한 듯 보입니다. 

지금은 피난민 2, 3세들이 20~30% 남아있고 요즘엔 대부분 타지에서 이사 온 사람들이 살고 있지요. 그래서 아직도 농원은 거의 소위 ‘일산 땅’으로 불리는 국유지입니다. 일산 땅은 일제시대에 일본인 소유로 되어있다 해방이 되면서 국가 소유가 된 땅을 이릅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국유지를 성업공사에서 관리할 때에는 간혹 그 국유지를 개인에게 등기를 내주었는데 토지개발공사에서 관리하고 있는 요즈음에는 등기를 내고 싶어도 못 내고 있습니다. 국유지를 정부에서 국토의 30%는 보유해야 된다는 정책 때문이죠,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죠. 초창기 정부에서 맨몸으로 넘어온 피난민들을 위해 흙으로 만든 벽돌로 집을 지었기 때문에 내가 어렸을 땐 토담집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마을에는 한두 개는 있을법한 기와집 하나가 없었지요. 그래서 황등에서 가장 못사는 동네는 당연히 농원이었죠. 그래서 친구들 대부분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답니다. 비가 오면 신작로까지 나가려면 빨간, 질퍽한 황토 흙에 바짓가랑이까지 묻어 학교에 가면 놀리는 친구들 때문에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릅니다. 고무신이 흙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으니까요. 당연히 생활도 어려운 가정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죠. 


이때쯤 동네에는 대부분 죽을 쑤어 먹었는데 그 죽이 어찌나 맛있어 보이는지 어머니한테 졸라서 밥 한 그릇을 가지고 가서 그 풀대죽과 바꿔먹던 일이 생각납니다. 아버지가 농원으로 자립하게 되어 논마지기 밭 몇 마지기는 있어 죽을 먹는 일은 없었지만 가난하기는 매 한 가지였습니다. 생각하면 내 유년의 기억은 우울하지만 둥개방죽은 또 즐거운 한 자락입니다


                                                            과거 둥개방죽이 자리했음을 나타내는 수로시설


# 어린이들의 놀이터 지금은 사라진 ‘둥개 방죽’

어렸을 때 우리 동네 앞엔 커다란 방죽이 있었습니다. ‘둥개 방죽’이란 이름은 제 추리로는 방죽 주변에 참나무가 많아서 참나무즙을 먹고 사는 둥개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둥개를 모른다고요? 풍뎅이의 전라도 사투리랍니다. 어렸을 적 둥개 머리를 비틀어 땅에 놓으면 빙빙 돌았지요.


가지고 놀 만한 장난감이 귀하던 시절 둥개는 재미있는 장난감 중의 하나였지요. 참나무 진액 냄새가 역하게 났지만요. 어릴 때부터 둥개 방죽은 어린아이들의 놀이터요 마당이었습니다. 아마 초딩 때 우리 둥개 방죽으로 ‘머스마’들 중에서 멱 감으러 오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었을걸요. 더운 여름 심심하면 몰려가 멱을 감고 세숫대야를 가지고 줄풀이 무성한 곳에 가면 뜸부기 알을 세숫대야 가득 주어 왔지요. 워낙에 큰 방죽이라 뜸부기도 많아서 꼬마들이 그렇게 가져오는데도, 며칠 후에 다시 가면 알은 또 있었으니까요. 알을 주우러 뜸부기집에 갔다가 커다란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걸 보고 기겁해서 도망쳐 나온 기억도 납니다


중학교 때는 방죽에 개구리, 작은 붕어를 잡아 주낙을 놓았다가 아침에 장대를 들어 올리면 낚시에 걸린 어른 팔뚝만 한 가물치, 메기 등이 힘차게 퍼덕거리는 모습을 보며 짜릿한 희열을 느끼곤 했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수문을 열어놓으면 수로를 따라 물고기들이 물을 거슬러 올라오지요. 작은 도랑에 소쿠리를 대고 있으면 작은 송사리를 세숫대야 가득 잡을 수 있었어요. 그때에는 참 흔한 게 송사리였습니다. 그걸 시래기와 함께 끓인 매운탕은 지금도 잊지를 못하는 그리움의 맛이죠. 봄가을엔 낚시꾼도 많이 오는데 술 담배 심부름해주고 얻어먹는 아이스케키 맛도 잊지를 못하겠네요.


봄기운이 무럭무럭 익어갈 즈음에 방죽 두덕에 가면 따듯한 햇볕을 쬐는 뱀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지요. 장대 하나면 몇십 마리는 거뜬히 잡았는데 돼지나 닭 키우는 집에 가져다주면 몇십 원은 받았죠. 농사가 끝나면 발동기를 동원해서 그 방죽을 품었는데 잡은 고기를 경운기로 서너 대는 가득 실어갑니다. 가물치 메기 붕어 장어 참게 등 참 많이도 잡혔습니다. 지금은 귀한 뱀장어도 많았는데 그때에는 사람이 안 먹고 돼지를 먹였지요.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기름기가 하도 많아 먹으면 설사를 하기 때문이었지요. 


겨울이면 그 큰 방죽이 온통 얼음판으로 변해 썰매를 타느라 하루해가 짧았습니다. 날씨가 푹 해지면 그 얼음판이 녹는데, 그때는 얼음판이 엿가락 휘어지듯 합니다. 그 위를 썰매를 타고 달리면 구름다리 위를 지나듯 스릴 만점이었죠. 얼음이 깨지면 방죽에 풍덩 빠져, 방죽 두덕에 불을 피워 젖은 몸과 옷을 말렸지요. 늦가을부터는 수만 마리의 철새가 그곳에서 이른 봄까지 겨울을 나는데 수천 마리의 청둥오리 기러기, 고니 떼가 방죽 위를 나는 군무는 장관이었지요. 지금은 모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지만, 그때는 '싸이나'라는 독극물을 나락에 묻혀 촛농으로 감싸 뿌려놓으면 오리 기십 마리는 주웠지요. 


필설로 다 하지 못할 만큼 많은 추억이 깃든 그 둥개 방죽도 개발에 밀려 지금은 농공단지가 들어서면서 메워지고 말았습니다. 농사짓는 물은 금강물이 들어오면서 해결되었고요. 고향에 와서 가슴 아픈 일은 찌그러진 황등산을 바라볼 때였지만 그보다 더 속상한 것은 메워진 둥개 방죽을 바라볼 때입니다. 둥개 방죽은 어린 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놀이터요 삶터였습니다. 도시에서 낳고 자란 울 아들들과 비교하면 이런 아름다운 추억을 가진 난 훨씬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내가 자란 농원과 둥개 방죽은 언제나 내 가슴속에 살아있을 겁니다.


글쓴이 고갑순

1959년생, 황등초 43회

남성고 졸업

전 좋은요양병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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