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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품는 문화 곳간, 황등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2-11-18 15:49:12
  • 수정 2022-11-18 16: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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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는 ‘황등 정착촌 주민토론회(2022년 11월 22일)’를 앞두고 주민과 전문가의 이야기를 5회에 걸쳐 나누어 게재합니다. 그 두 번째입니다. 황등면민 그리고 출향민들의 고견을 기다립니다./편집국

                                                                                             1929년 황등호

                                            

# 한국 근대사의 사연이 깃든 ‘황등’

익산시 북쪽에 황등면이 자리한다. 황등(黃登)은 ‘큰 구릉 등성이’를 뜻하는 말로 옛날의 남이면과 동이면 그리고 북일면 일대에 펼쳐진 넓고 넓은 평야지대가 연이어져 있는 데다가 황등 석산을 바라보면 어마어마한 웅대한 구릉인 산등성이가 웅크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웅장하게 ‘큰 등성이’를 간략하게 줄여서 표현한 말이 ‘한등이’였을 것이다. 원래 ‘한’이란 말의 옛말 뜻은 ‘크다. 많.’란 의미를 가진 옛 이름(古語)이다. 대한민국이란 ‘한국’도 ‘크고 위대한 나라’란 뜻이다. 이 ‘한등이’를 자주 입에 오르내리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황등이’로 변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익산시 황등면과 군산시 서수면, 임피면 일대의 평야는 비옥한 미작경지(米作耕地)로서 그 수원(水源)을 황등호(黃登湖)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황등호는 보수는커녕 관리마저 제대로 되지 않고 방치돼 토사 매몰이 가속화되면서 저수지의 모습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에 옥토(玉土)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일본인이 1909년에 임익(臨益) 수리조합을 설치하고 황등제 복구를 목적으로 제방을 증축,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요교호에 황등제가 축조된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조사 자료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1923년에 용산성의 석재를 빼어 황등제 수축에 이용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즉 황등제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 축조되었다. 

황등제는 수리(水利) 현대화의 첫걸음이었고 다른 측면에서는 일본의 농업분야 침탈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1935년에 완주군 경천저수지가 완공되면서 황등제는 다시 도로로서의 역할만을 맡게 됐다. 요교호가 정확하게 언제 생기고 폐지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백제 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확실한 것인지는 단정 지을 수 없으나 이 황등제가 있는 지역의 바로 인근에 황등면의 도선(배 나들이, 渡船), 백길(뱃길, 白吉), 섬말(섬 마을, 島村) 마을과 같이 수로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 있으며, 요교의 바로 남서쪽에 어은리라는 곳이 있어서 금강과 만경강을 이용하여 미륵사로 들어오던 임금이 잠깐 머물렀던 데서 유래한 지명이 아닌가라고 생각된다. 이 지역 또한 수리로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황등은 알면 알수록 특별하게 다가오는 묘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황등을 대표하는 황등산의 석재산업이나 고구마나 황등제(黃登堤)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한국근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아냈기에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 만신창이가 되다 보니 흠결도 있다. 그러나 짓밟히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풀과 같이, 거센 바람에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꽃을 피우는 생명력을 연상시키는 사연이 깃든 곳이 황등이다. 


# 백낙규와 계원식

황등은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기독교 교세가 강하다. 그러므로 황등을 이해하고 황등에 담긴 이야기를 펼치려면 황등의 기독교를 이해함이 좋을 것 같다. 이런 황등 지역의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작업으로 황등에 기독교가 자리매김하던 시절의 선각자로 동련의 백낙규(사진 좌 1876~1943)와 황등의 계원식이 있다. 백낙규는 전남 승주군 출신의 동학 소접주 출신으로 동학농민운동에 투신해 우금치 전투에 참전했다. 백낙규 장로는 1900년 하위렴(윌리엄 해리슨) 선교사를 통해 신앙을 접하고 이후 전북 익산에 동련교회와 계동학교를 설립하는데, 조선의 8대 문장가로 꼽혔던 옥봉 백광훈의 12대손이기도 하다.

계원식은 평양출신으로 3.1운동 당시 임시정부에 독립군 군자금을 제공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남다른 민족정신을 지닌 선각자들이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동련교회와 황등교회가 설립되었다. 

두 교회는 외국선교사나 백낙규나 계원식이 혼자서 설립한 교회들이 아니다. 여럿이 함께 설립한 교회들이다. 물론 더 많이, 더 크게 공헌한 사람이 분명 이들 두 사람일 수는 있으나 이들은 자신을 교회의 주인이거나 대표라고 생각지 않았다. 

두 사람은 황등 토박이가 아닌 외지인들로 남다른 열정으로 믿고 실행한 일들이 실패하여 숨어들다시피 하여 이주해 온 곳이 황등이었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와선 황등을 제2의 고향으로 여겼다. 이들은 교회 일에서 협력을 중시했고 교회가 지역과 함께하고 교육을 중요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런 특징은 오늘날의 황등 기독교를 이해함에도 유익하다. 황등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기독교 교파 사이의 분쟁이나 갈등이 없다. 다양한 교파가 상존하나 비교적 교파를 넘어서 연합과 일치를 위한 노력들이 지속적이고 실제적이다. 

지금도 황등면 교회들은 황등면교회연합회 주관으로 3·1절 기념예배와 8·15 광복절 기념예배를 드릴 정도로 나라사랑의 정신이 남다른 지역이다. 이런 정신은 같은 지역에서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서 함께하는 교회일치 운동의 전통이다. 

이는 전북지역이 오래전부터 동학농민항쟁의 진원지이고, 애국지사들이 많이 배출된 지역으로 그 맥이 3·1운동으로 이어져 왔다. 이에 익산지역의 3·1운동을 살려보는 것도 백낙규와 계원식이 꿈꾼 교회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1936년 황등예배당


# 동련교회와 민족학교인 계동학교

황등 사람들은 백낙규와 계원식을 품고 이들을 지역의 어른으로 존귀히 여겼다. 그러기에 이들은 황등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황등의 교회와 지역을 위해 헌신하였다. 이들은 신학을 전공하고 직업으로서 교회 일을 하는 목사가 아니었다. 자신의 몸으로 열심히 일을 해서 교회를 섬기고 교인들과 함께하면서 살았다. 또한 이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들은 자기 교회만의 유익이나 성장에 급급하지 않았다. 

동련교회는 민족학교인 계동학교를 설립 운영하였고 원근각처에 여러 교회를 분립하였고 지역 노인복지를 위해 실제적인 복지를 실천하고 있다. 황등교회는 황등중학교와 성일고등학교와 황등어린이집과 황등신협을 설립운영하고 생명나무와 황등사립작은도서관을 운영해서 교회를 통한 지역사회에 유익을 주고 있다. 또한 황등교회로 인해 여러 교회가 분립과 나누기 형태 등으로 설립되었다. 이중 눈여겨볼 교회가 황등 신흥교회이다.  


                                                                                            동련교회 종탑

# 피난민을 위한 황등 농원(農園)교회  

황등신흥교회는 김은기를 중심으로 설립된 교회이다. 김은기는 계원식과 같은 평양 출신으로 1951년 1월 4일 이른바 1․4후퇴 시 월남하여 1951년 전주고아원에 재직하다가, 전주 사랑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김은기는 계원식의 차남 계이승을 통해 시계제작 기술을 배우기도 하면서 고향 선배인 계원식의 집에 드나들면서 따랐다. 

김은기는 1953년 12월 13일 계원식의 권면으로 당시 월남한 이북출신들이 모여 살던 황등 농원(農園) 지역에서 36명을 전도해서 후생농원 사무실을 빌려 예배드렸다. 이것이 농원교회(현재, 황등신흥교회)의 창립이다. 


                                                        옛 농원교회가 기초가 된 황등신흥교회


김은기는 1966년 9월 1일 계원식과 논의한 끝에 이 교회를 군산노회에 가입시켰다. 그 후 1960년 충남 대덕군 유성면 구성리에 농원교회를 설립하고는 다시 황등으로 돌아와, 1968년 10월 27일 도촌교회(현재, 흰돌교회)를 설립하였다. 1981년 12월 13일 김은기의 오랜 동지인 이대호와 함께 도촌교회 초대 장로로 임직하였다. 

1994년 3월 1일 김은기의 장례는 김은기가 설립한 황등신흥교회와 황등신흥교회에서 분립한 번영교회와 김은기가 이대호와 함께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흰돌교회로 3개 교회가 연합으로 치러졌다. 

이날 조사(弔詞)는 김은기의 평생지기 이대호가 썼고, 낭독은 이대호의 아내 김금자가 맡았다. 이대호가 쓴 조사에는 김은기를 가리켜, 황등교회 박긴호 권사의 말을 인용해서 ‘세례요한 같은 분’이라고 하였고, 이리신광교회 안경운 목사의 말을 인용해서 ‘성자’라고 하였다.

황등의 기독교는 보복이 없는 평화를 지향하게 하였다. 일본인들은 제2차 대전에 패망하면서 곧바로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는 해방정국의 혼란기로 일본인들이 안전하게 황등을 빠져나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1957년 황등 충혼탑


온갖 착취와 수탈로 시달린 사람들이 어떤 일을 벌일지 몰랐다. 그런데 황등 지역은 기독교 정신이 강하게 깃든 곳이기에 일본인들에 대한 보복이 없었다고 한다. 황등교회의 계일승 목사와 교인들은 이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지금도 더러 이 당시 일본인 후손들이 종종 황등을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머문 집과 창고 등이 황등중학교의 전신인 황등고등공민학교와 황등중학원의 터전이 되었고, 일본인 소학교 자리에는 제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 근처에는 황등 신사(神社)의 흔적이 남아있고 그 자리에 충혼탑과 6·25사변 순국지사 충혼비가 있다. 

  

    글쓴이 한승진

1969년 서울 구로동 출생. 성공회대 신학과 졸업. 상명대 국어교육과 졸업. 한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공주대 윤리교육과 교육학박사. 저서 <현실사회윤리학의 토대 놓기>, <사랑의 종 그 언저리에서 길을 묻다>, <작은 불꽃 기성 계원식의 삶과 신앙> 등이 있다. 황등중학교 교목/특수교사와 황등교회 교육협동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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