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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아름다우리라는 고백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2-11-27 15:2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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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그날 익산을 떠나오며 조만간 이곳을 다시 찾게 되리라는 예감을 했다. 지난날을 아파하고 다가올 미래를 미리 걱정하느라 현재에 발붙이지 못하고 있던 때 찾은 그곳에서, 서서히 스며드는 회복의 징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익산에서 나는 그저 사람들을 따라 걷기만 했을 뿐이었으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오랜 이야기가 곧 아름다운 미래에 가닿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란 건 그저 묵묵히 자기가 할 일을 하고 있으므로. 모든 것의 역사는 결국 제자리를 찾을 거라는 믿음으로 나도 내게 주어진 몫을 한다면, 무언가를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짧아진 낮, 만경강가의 붉은 노을 아래 너른 억새 군락지를 바라보면서 지난여름의 익산을 가만히 떠올린다. 


하고픈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근대골목을 지나 도착한 익옥수리조합 건물 앞에 서자마자 든 생각이 그랬다. 평소엔 까맣게 잊고 살다가도 나라의 아픈 역사를 견뎌낸 건물을 보면 별안간 마음이 가라앉곤 한다. 아마도 여지없이 아팠던 지난날의 내가 같이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건물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인데, 못다한 말들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대지주들이 식량수탁과 그 과정에서 생기는 거의 모든 비용전가의 목적으로 세워졌고 우리나라의 소작농들은 말할 수 없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는 이야기. 한 대학의 연구원께서 세세한 설명을 들려줄 때는 마치 당시의 일들이 어제 있었던 일처럼 느껴지지도 했다. 그와 같은 일들이 아직도 내 주변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일까. 이야기를 듣는 동안 다문 입은 깊은 탄식을 내뱉을 때만 열리곤 했다. 그러다 건물의 역사적 가치과 건축학적 가치를 연구하고 지켜낸 분들에 의해 이제는 또 다른 역사, 문화적 치유의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여름의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나는 문득 가라앉음과 정처 없는 부유를 반복하고 있던 작은 마음이 제자리를 찾는 것을 느꼈다. 무너진 돌들을 다시 쌓아 복원된 탑을 바라볼 때처럼, 아픈 역사의 자리에도 아름다움은 있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는 모든 것이 보였을 테지요.” 건물을 돌아 나올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 세상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을지도 모르겠고 새벽부터 고요한 눈발이 흩날릴지도 모를 계절이 올 때 다시 찾을 익산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천오백년의 찬란한 역사 속을 걷는 동안, 광활한 지평선을 바라보며 두고 온 것들을 잠시 잊는 동안, 지키고 싶은 것들을 떠올리며 나바위 성당과 원불교 성지를 천천히 걷는 동안, 한적해진 포구와 오래된 서점을 향해 걷는 동안, 정갈하게 차려진 정성스러운 음식을 먹는 동안 아마도 나는 쓸쓸한 마음을 가만히 회복하고 삶의 아름다움을 다시 믿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이곳의 아름다움 또한 거의 영원에 가깝도록 지켜지리라는 것을.  


글쓴이 이주란

2012년 세계의문학으로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소설집 <모두 다른 아버지>,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 있고, 장편소설 <수면 아래>, 중편소설 <어느 날의 나>가 있다. 제25회 김준성문학상과 10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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