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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의 시원과 미래, 왕궁면의 과거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3-02-03 14:45:53
  • 수정 2023-02-09 12: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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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산의 미래, 이제는 왕궁이다’ 기획 연재
왕궁면은 새해 초부터 ‘익산의 미래, 이제는 왕궁이다’란 주제로 왕궁면민 혁신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이 교육은 왕궁면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역사와 문화, 물류와 교통, 그리고 미래 6차산업까지 모색하는 장이어서 그 의미가 깊다. 이 행사를 후원하는 <익산투데이>는 왕궁면민 혁신교육을 진행되는 6주간 지면을 통해 교육내용을 현장 중계한다.

                         

                 물고기를 닮은 1917년의 왕궁면 지도(왕궁면지 편찬위원 최정호)


# 백제의 오래된 정원, 왕궁면 

호남의 관문 익산시는 만경강변에 자리한 근대 신흥도시 이리시(裡里市)와 역사도시 익산군(益山郡)이 결합한 도농복합도시이다. 1995년에 출범했으니 벌써 30년이 다 되어간다. 1912년 호남선 이리역의 설립으로 출발한 이리가 ‘근대의 대문’이라면, 익산군은 저 옛날 마한과 백제를 안고 있는 안뜰 혹은 ‘오래된 정원’이다. 그 중심에 왕궁면이 자리한다. 


호남의 북단 익산시 동쪽에 자리한 왕궁면은 북고남저(北高南底)로 마치 긴 물고기의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저 위쪽은 신령한 이름의 용화산(龍華山)이고 만경강으로 이어지는 비옥한 농토를 이루는 쪽은 온수리(溫水里)에 가까우니 어찌 아름다운 이름이 아니랴. 왕궁면은 동과 서가 좁은데 동쪽은 산악이 많은 완주군과 경계를 이룬다. 그 경계는 세월에 따라 우주(紆州)현과 우북면 그리고 제석면의 이름을 갖다가 이제는 익산시 왕궁면이 되었다. 


근대문명의 상징인 열차가 호남평야의 중심인 익산지역에 다니기 전에는 만경강을 문물의 통로로 사용하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왕궁터에 가까운 옥룡천 혹은 부상천 상류까지 문물을 교류하는 크고 작은 배들이 물때에 맞추어 드나들던 시절이 있었음을 학자들이 이야기한다. 용화산과 시대산을 흘러온 부상(扶桑)천 물줄기는 왕궁 성을 지나 옥룡천과 합수하고 더 아래인 익산시 춘포면 천동리에서는 익산천을 이루어 만경강을 거쳐 서해로 나간다. 


일제가 익산천을 새로 형성하기 전에는 수량이 풍부하여 왕궁평 근처까지 배가 드나들었다는 사실은 여러 지명의 흔적과 어르신들의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호남고속도로 나들목을 지나 익산시로 향하는 무왕로의 초입은 왕궁면을 남북으로 나눈다. 북쪽에는 함벽정과 보석박물관이 자리하고 남쪽에는 왕궁리유적이 있다. 탑 하나만 외로웠던 왕궁리의 30여 년의 지난한 발굴은 이곳이 왕성(王城)이었음을 증명해냈다. 백제 무왕의 궁전이었던 궁의 남쪽 전방은 정무를 돌보는 공간이고 북쪽 후원(後園)은 자연 완상(玩賞)과 휴식공간임을 밝혀냈다. 물고기 형상의 왕궁면의 모습도 크게 보아 왕궁성의 모습과 비슷하다. 쉽게 말해 위쪽은 경치가 아름다운 휴식공간이고 가운데 부분은 생산과 일터로서 만경강에 이르며 아래쪽은 일하는 공간이란 말이다. 우연에 따른 해석일 것이다. 익산시를 가로지르는 무왕로에 이어 왕궁면을 가로지르는 ‘왕궁(王宮)로’ 그리고 ‘제석사지(帝釋寺址)로’라는 이렇듯 무겁고 역사적인 도로명 주소를 갖는 지역도 흔치 않을 것이다. 


조금 들여다보면, 백제 때는 우소저현(于召渚縣)이라 했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우주현으로 바꿔서 금마군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고려 초에는 전주부에 속하다가 1896년 익산군에 편입되었다. 오늘날 왕궁면 면내 5개 리(里)는 본시 우주현에 속했던 곳이고 그 밖의 공간은 익산군에 속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전 우주현 우북면(紆北面)이었던 동봉리, 동룡리, 광암리, 흥암리, 구덕리 그리고 제석면(帝釋面)이었던 저 위쪽 용화산 자락을 이고 있는 용화리, 도순리, 동촌리, 왕궁리, 평장리, 발산리, 쌍제리 그리고 저 아래쪽 다순 물 나오는 동네, 온수리가 합해져 바로 왕궁면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효율성을 강조한 강제적 행정개편으로 면의 외양이 이루어졌는데, 벌써 백 년이 넘어 이제 우북과 제석의 이름을 뒤로한 채 왕궁면은 한 몸을 이루어 한 살로 살아가고 있다. 


일제강점기 새로운 면의 이름을 지을 때 ‘왕궁면’이라 이름한 누군가의 명칭에 대한 혜안과 고집이 있었을 것이다. 옛적에 이곳이 왕궁이 있었다는 설과 오래도록 서 계신 탑, 또 멀지 않은 곳의 왕릉도 한몫했을 것이다. 오늘날 왕궁면의 행정구역은 13개 리 57개 마을로 구성돼 있다. 그 면적은 총 4,701여 ㏊로서 거의 여의도 정도의 크기로 익산시에서는 가장 넓은 땅을 자랑한다. 


# 해가 뜨는 동네, 부상(扶桑)

'산이 더해지다'란 뜻의 익산(益山)이라는 뜻과 가장 어울리는 지역이 바로 왕궁면이다. 아래쪽은 평지이고 위쪽으로 올라가면 산지가 많으니 산이 더해짐을 알 수 있다. 왕궁면은 위아래가 길다. 위쪽은 용화산과 시대산이 걸쳐져 있고 그 골짜기를 막으니 아름다운 저수지를 바라보는 곳에 함벽정이 의젓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왕궁면의 물길에 심상치 않은 이름이 있으니 바로 부상천(扶桑川)이다. 


‘부상(扶桑)’이란 명칭은 해가 뜨는 지역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신목(神木)인 뽕나무를 이름한다. 고대의 세계관이 드러난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태양이 이 뽕나무에 걸려야 아침이 오는 것이라 한다. 사람들과 산천초목의 낮을 지킨 태양은 함지(咸池)에 들어간다. 거기서 목욕하고 밤을 즐긴 뒤에 양곡(暘谷)이라는 곳에서 돋아 부상이라는 나무의 꼭대기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 반복되는 것이 인류의 역사라 말하는 책이다. 여기 ‘양곡’과 ‘부상’을 다 갖춘 이름이 바로 왕궁면이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부상이란 이름을 쓰는 곳은 왕궁면의 오른쪽이 유일하다. 왕궁에서 바라볼 때 동쪽의 내에서 해가 뜬다는 사고는 이곳이 행정과 정치의 중심이었음을 말해 준다. 


백제 왕궁의 서쪽을 흐르던 옥룡(玉龍)천과 합류한 부상천은 왕궁면 소재지 남쪽을 흐르는 왕궁천과 천동리에서 합류하여 익산천을 이룬다. 동촌리(東村里)의 오래된 마을 이름인 오포(五浦) 혹은 자라메〔鰲山라는 오산(五山), 갯밭을 이르는 포전(浦田) 등 마을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전에는 만경강의 물길이 이곳까지 이어져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BC 1세기로 추정되는 세형동검(細形銅劍) 등이 발견된 평장리의 ‘섬들’이란 지명 역시 옛날에는 배가 닿던 곳임을 엿볼 수 있다. 종합해보면 왕궁의 화려한 역사에는 문물을 교류하는 강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왕궁면에는 봉(鳳)과 용(龍)이 들어간 마을 이름이 흔하다. 거기다 학호(鶴虎) 학평(鶴坪) 등 호랑이와 학이 들어간 이름도 있다. 꾀꼬리를 말하는 앵금(鶯金)리도 있다.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왕궁저수지가 축조되기 전에는 용화산 자락 도순산에서 흘러내린 물들이 만경강을 향하여 들판을 적셨으리라. 용은 곧 농경사회의 신이자 물을 이름한다. 하여 용남(龍南)에서 용이 올랐다는 전설과 더불어 후일 저수지가 들어서니 그 이름이 신묘하다. 1931년 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적지 않은 민가들과 삶의 터전이 수몰되었을 것이다. 


왕궁면의 끝자락이자 삼례에 가까운 온수리(溫水里)는 처음에는 마을 이름을 화산(華山)이라 했는데 따뜻한 샘물이 솟아 온수동이라 일컫게 됐다. 1980년대 온천으로 개발, 왕궁온천이란 이름 아래 오래도록 전주와 익산지역의 많은 손님을 맞이했던 곳이다. 


# 카리스마 무왕의 궁전과 후원

왕궁(王宮)! 왕궁은 국가의 군주가 거주하는 집을 말한다. 왕궁에는 왕이 살고 왕궁 앞 궁뜰에는 신하들이 살 것이다. 이런 명칭을 가진 곳이 오직 왕궁면에만 있다. 바로 1400여 년 전에 백제 왕궁이 자리했던 장소이다. 또한 왕과 귀족들이 다니던 사찰이 가까운 곳에 있었을 것이니 바로 제석사지(帝釋寺趾)다. 폐허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하지만 지금도 주춧돌을 볼 수 있는 이곳은 왕실 사찰이다. 궁뜰, 궁평(宮坪)의 서쪽이 제석들이고 물이 좋아 신정리(新井里)이고 탑이 있으니 왕궁탑 아래 마을 이름은 탑리(塔里)이다. 


고 김삼룡 박사가 이끈 원광대학교의 마한백제연구소 연구원들은 오랜 기간 이곳 왕궁터를 발굴 조사한다. 왕궁을 둘러싸고 있는 궁장은 동벽 492m, 서벽 490m, 남벽 234m, 북벽 241m의 장방형으로 축조되어 있다. 직사각형의 터전에서 성곽터와 건물을 발굴ㆍ조사하는데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발굴의 결과 지대석, 사구석, 포석, 장벽의 적심석 등이 발견돼 옛 궁성임이 드러났다. 이어서 석축 주변에서 백제시대의 정원 유적이 비교적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정원 주변에서는 왕궁의 내부 시설들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복잡한 수로 체계가 확인되어 고대 왕궁의 수로 체계를 규명할 만한 자료가 확보되었다. 정원의 양식은 중국에서 유행했고 일본에서 비슷한 양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왕궁리의 정원유적은 동아시아 정원 양식 변화의 표본이다. 그 내부는 궁성의 중심인 남측의 정무·생활공간과 북동 측의 후원, 북서 측의 금세공을 위시한 공방 등 공간의 활용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이제 백제 왕도로서 무왕의 익산 천도를 의심하는 사람은 적다. 


백제의 멸망에 이어 왕궁의 기능이 사라지고 새로운 정치세력은 이곳에 절과 탑을 세웠다. 통일신라, 고려까지 한동안 존속했지만 절 역시 세월이 흐르며 사라졌다. 그 뒤에는 빈터에 사찰 시절의 석탑만이 홀로 남아 지금까지 남아있다. 조선시대인 1756년에 간행된 『금마지』에는 석탑과 관련된 전설이 기록되었고, 1872년에 편찬된 『호남읍지』의 익산군 지도에는 왕궁탑이 그림으로 그려졌다. 왕궁리 5층석탑은 높이 8.5m로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솟아 있다. 지붕돌은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하다. 장중한 느낌과 더불어 균형미와 상승감을 갖추고 있는 석탑이다. 깊은 눈으로 보아야만 보이는 옥개석의 상승감이 보이는 귀물로서 현실의 경치마저 세상 밖으로 보이는 곳이 왕궁리 탑이 서 계신 곳이다. 왕궁탑은 1965년에 해체. 복원 공사를 했다. 이때 일층 옥개석과 기단부에서 19매의 금제 금강경판과 금제 사리함과 사리병, 금판 불경, 청동 여래입상 등이 발견되었다. 


제석사지에는 목탑의 초석만 남아 비밀을 감추고 있지만 폐기장은 역사적 사실의 힌트를 제공한다. 백제 무왕의 천도 사실은 제석사와 『관세음응험기』에 나온 기록과의 팩트체크를 통해서 가능하다. “백제 무광왕(武廣王)은 지모밀지(枳慕蜜地)로 천도하여 정사(精舍)를 새로 경영하였다. 기해(己亥, 639)년 동짓달에 하늘에서 큰 뇌우(雷雨)가 쳐 제석정사(帝釋精舍)에 화재가’ 났다”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관세음응험기』에서 언급된 금판경과 사리함은 1965년 왕궁리 5층 석탑에서 출토되어 국보 제123호로 지정된 사리 장엄과 일치한다. 익산 왕궁리유적이 백제 무왕의 왕궁이었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 명문가(名門家)의 고향 왕궁

왕궁면에는 오래된 석인상과 창연한 재실(齋室) 등 조상을 섬기는 마음이 지극한 이름있는 성씨들이 즐비하다. 지식과 통찰력을 갖춘 선비들로 충신, 열사, 의사, 의병 등 지역사회에 봉사와 기부 등 지역공헌도가 높은 인물들이 많다. 송영구로 대표되는 진천(鎭川) 송씨(宋氏)와 소세양으로 대표되는 진주(晉州) 소씨(蘇氏) 문중은 가문을 넘어 이 지역의 자랑이다. 두 문중에서 문과와 무과에 급제한 분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어 일일이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왕궁면 장암리 너럭바위에 서면 먼 산과 장암 사이 냇가와 들판이 살기 좋은 곳임을 알 수 있다. 호남에서 제일가는 명당으로 맹인이 보아도 좋은 풍수 자리라 한다. 이곳 장암의 본이름은 ‘마당바위’로 산기슭에 큰 바위가 넓게 깔려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다. 장암 마을에는 조선 선조 때 경상감사를 지낸 깨끗한 벼슬아치로 추앙받는 표옹 송영구를 추모하는 사당이 세워졌는데 그 글씨는 당시 명나라의 문장가요, 명필인 주지번이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광암리(光岩里) 장중마을 망모당(望慕堂) 앞으로는 왕궁천이 흐르는데 병조참판을 지낸 송영구의 집터 후원에 있다. 또한 숙종 때에 판서를 지낸 송창도 이곳 출신이다. 


나라를 빛내거나 왕궁면을 빛낸 인물과 문중에 대한 수고는 거룩하다. 학문과 풍류로 이름이 높은 소세양과 행정과 외교의 달인 송영구 같은 어진 선비를 비롯하여 왕궁면은 인물의 고향이다. 우주황씨, 전의이씨, 연안이씨, 남양홍씨, 성주이씨, 김해김씨, 부여서씨, 전주최씨, 능성구씨를 비롯한 많은 문중에서는 족보를 귀히 여긴다. 그중에서 구한말 유림의 대표로 좨주(祭主)를 맡은 송병선(宋秉善)도 기억할 만한 인물이다. 근현대 초상화의 대가 채용신 역시 왕궁을 빛낸 인물이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분연히 일어난 사람들이 있다. 1907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의병전쟁에 참여하였고 7년 형의 옥고를 치른 송태식, 1919년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른 김광덕과 송종석 역시 왕궁의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홍순갑 선생은 금마사람이라 하나 의병활동과 독립운동가가 금마와 왕궁을 구별해서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어려운 시절 시대마을에서 노동야학교인 시대학원(始大學院)을 연 안림마을의 지주 김만기(金滿基) 선생도 기억할 만한 인물이다. 정계 인물로는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4선에 이어 초대 참의원 부의장을 지낸 소선규와 국민은행장과 은행감독원장 등을 지낸 송병순, 전라북도 교육감 재직 시 전북과학고를 설립한 홍태표, 원광대에서 제자를 길러낸 소설가 홍석영 등도 기억할 만한 인물이다. 


글쓴이 신귀백<익산근대문화연구소장>

문학박사. 『영화사용법』, 『전주편애』, 『이리역의 까마귀떼』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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