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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김대중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4-01-10 10: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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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의 해, 1월 6일은 김대중(DJ)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에 맞춰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 김대중>이 1월 10일 개봉되었다. 익산에서는 CGV에서 특별 상영하였다. 원광대학교 이재봉 전 교수께서 시민들 누구나 무료 관람할 수 있도록 1회 한정판으로 대관해 놓은 덕분이었다. 타 도시로 발품 팔지 않아도 되었다.


영화 제목 <길 위에 김대중>의 의미를 DJ의 <김대중 자서전>에서 찾아보았다. “나는 늘 길 위에 있었다. 어디서든 부르면 달려갔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 차 속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서 늘 고단했다. 많은 사람이 내 연설과 삶에 박수를 보내고 격려했지만 돌아서면 외로웠다. 그 뒤에는 나 홀로 흘려야 하는 눈물이 있었다. 그것은 곁에 있는 아내도 때론 몰랐다.” 이 영화는 바로 DJ의 화려하고 대중이 열광하는 모습보다 그 행적 속의 내면을 그려낸 작품이라 하겠다.


DJ와의 인연은 1987년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교 2학년 때였으니까 어느덧 3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해는 격동의 나날이었다. 새해 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14)을 시작으로 4‧13 호헌조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성명 발표(5‧18),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6‧9),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6‧26), 6‧29 민주화선언, DJ 사면‧복권 조치(7‧9), 7‧8‧9월 노동자 대투쟁, 야당 대통령 후보 단일화 최종 결렬(9‧29), 헌법 개정 국민투표(10‧27, 대통령 직선제), 평화민주당 창당(10‧30), 대한항공기 폭파사건(11‧29), 그리고 제13대 대통령선거(12‧16). 대한민국의 봄이었다. 대학생들이 중‧기말고사와 수업 거부로 학업이 파행되었다. 원광대학교에 등교하면 중앙도서관 앞에 모여 집회했다. 그리고 나면 거리 시위에 나서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영화 필름 속에서 DJ와의 한 토막 추억이 스쳐 지나갔다. 경험담이다. 1987년 늦가을 11월 15일, 전남‧전북‧경남‧경북‧부산‧대구 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과 전남‧전북‧경북‧부산‧대구 국민운동본부에서 주최한 ‘군부독재 종식과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영‧호남 시민결의대회’가 대구 두류공원에서 있었다. 이날 초청 인사로 DJ, 문익환, 이인영이 참여했고, YS는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전대협 대학생들은 전날 경산 영남대학교에 집결하였다. 남도의 수많은 대학생이 일시에 몰려드는 바람에 캠퍼스는 어수선해졌다. 밤늦도록 토론회를 갖고 하룻밤은 강의실에서 스티로폼을 깔고 자야만 했다. 새벽이 되자 추웠지만 덮을 것이 없어서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때우고 두류공원으로 향했다. 대학생들은 겹겹이 인간 띠로 연단 주변을 에워쌌다. 만약에 모를 폭력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경계 강화였다. 11월 14일에 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광주 역전 집회가 폭력 시위로 끝내 중단 사태를 빚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긴장감이 고조 되었다.


문익환 목사가 찬조 연설하고 있을 때 군중들 사이에서 욕설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러더니 돌멩이, 유리병, 달걀이 연단으로 날아들었다. 그때 DJ가 비서와 경호원들을 뿌리치고 구원투수로 연단에 섰다. “내가 돌에 맞겠습니다.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악의 무리에 맞서 내가 싸우겠습니다. 나에게 돌을 던지시오.” 하면서 연단 옆에 있는 경호원의 방패막이를 두 손으로 쳐냈다. 집회에 참여한 군중은 7만 명 정도였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대학생들은 밀리지 않기 위해 온몸으로 방어해야만 했다. 순간 군중심리가 어떻게 돌변할지 몰라 긴장 속에 겁이 났다. 자칫 폭동이라도 발생하면 누가 누구를 보호하고 막아야 하는지 두려웠다. 


연설이 시작되자 또다시 일부 괴한 청년들이 돌과 흙, 달걀과 유리병 투척이 이어졌다. 외곽에서 연단 중앙으로 들어와 유세를 방해하려는 그들과 질서 유지를 하려는 대학생들이 곳곳에서 몸싸움을 벌였다. DJ는 “여기서 지면 민주주의는 없습니다. 내 머리가 깨지더라도 나는 내려가지 않을 겁니다. 죽어도 나는 이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라며 버텼다. 점차 군중들의 동요가 가라앉았고, 투척도 하지 않았다. DJ가 긴 연설 대신 짧고 굵은 연설을 30여 분 마치자 청중들이 박수로 화답해 주었다. 그런 용기가 어디에서 났을까. 존경스러웠다. 젊은 날의 가슴 떨린 경험이었다. 그날 모습이 영원히 잊히지 않는다. 


대구 두류 공원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경부고속도로 버스 안에서 9시 뉴스를 시청했다. 방송은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일부 괴한의 폭력적인 장면만 보도되었다. DJ의 의연하고 단호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먼 훗날 이는 영‧호남 지역감정을 조장하려는 군사정권의 치밀한 계획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다. 불행한 역사는 절대로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나는 평소 행동하는 양심, 인동초의 대명사 DJ를 대한민국의 최고 정치지도자라 여겨왔다. 그는 생의 끄트머리에서 “늘 길 위에 있었기에 고단했지만 내 자신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고 게으름을 경계했다.”라고 재차 강조하였다. 대한민국에 후광을 비추어주소서. 다시 길 위에서 서성거리는 <김대중 자서전>을 두 손으로 펼쳐 들어야겠다. 


글쓴이

채수훈 익산시 위생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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