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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 한센인 정착 농장의 미래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4-03-18 11:4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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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백제왕도 왕궁면에는 한센인 정착 농장이 있다. 한센병균은 나균 또는 나병이라고 불린 만성감염병이다. 한센은 노르웨이 의사로서 1873년 나균을 발견하였고, 그 이름을 명명하여 한센병이라 불리게 되었다. 왕궁면 구덕리․온수리 일대에는 한센병 환자들 정착촌인 익산․금오․신촌 농장이 있다. 왕궁 한센인 정착촌 하면 이 세 농장을 합쳐서 부른다. 전국 82개 정착 농장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왕궁 한센인 정착 농장은 1948년 정부가 부랑자인 한센인을 모아 격리정책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구덕리 오봉산 자락에 인근 완주군 중인리에 거주하던 한센인들을 무장 경찰의 호위 속에 강제 이주시켜 요양소인 소춘원(蘇春園)을 설립하였다. 이 지역은 나무와 숲이 우거져 있는 황무지로 척박한 땅이었다. 옛 삼남대로로써 울창한 산림이 뒤덮여 도둑놈 소굴이라 불렸다. 


한센인들은 농지를 개간하고 주거환경을 개선하면서 생활 기반을 마련할 둥지를 틀게 되었다. 하지만 정착 농장을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센병 치료제인 DDS가 개발되기 전이었기에 환자들은 투병과 배고픔의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원생들은 땅을 개간하고, 마을의 도로를 건설하는 등의 노역을 군용천막과 움막에서 지내며 해야 했다. 중노동으로 인해 지병이 악화하였고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기도 하였다.


소춘원은 1949년에 소생원(蘇生園)으로 바뀌었고, 1955년에 전북 도립 요양원이던 이 시설이 국립 소생원으로 승격하였다. 1956년 이 시설에 1,709명이 생활하여 소록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였다. 국립 소생원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중간지역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한센병 환자들이 나날이 증가하였다. 1960년 국립 소생원이 국립 익산병원으로 바뀌었다.


1968년 양성 환자들과 자활 능력이 없는 원생 200명을 소록도 병원으로 옮기고 익산병원이 문을 닫았다. 정부는 남아 있던 800여 명에게는 1인당 농지 80평씩 분배하였고, 자활할 때까지 생계를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익산농장이 설립되었다. 가족과 이별하여 병원 격리수용에서 벗어나 자유인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1969년에 신촌농장이 설립되었다. 1971년부터는 소록도에서 완치판정을 받은 한센인들이 자활을 꿈꾸며 왕궁 한센인 정착 농장으로 이주해 오기 시작하였다. 외부 한센인 유입에 따른 인구 팽창으로 금오농장이 1975년 호남고속도로 서쪽에 설립되었다. 


처음 농장에 정착한 한센인들은 토끼와 닭을 사육하여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정부가 강제 이주시킨 한센인들에게 1970년대부터 생계 수단으로 축산업을 장려하면서 정착촌에 축사가 우후죽순 난립했다. 2010년에 정착촌 59만9,432㎡에서 208개 농가가 가축 11만3,963 두수를 사육하고 있었다. 지역사회에 축산 환경오염 문제로 심각한 위협 요인이 되었다. 대형 축산단지가 밀집하자 악취가 심해졌고, 비라도 오면 축분이 만경강으로 떠내려가 수질오염이 악화하였다. 호남고속도로 삼례나들목 부근에 차가 지날 때 축사악취가 심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또한 2012년에 왕궁면 소재지 부근에 국가식품클러스터가 조성되며 입주 기업들이 악취 때문에 피해를 호소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2010년에 7개 부처가 합동으로 ‘왕궁 정착 농원 환경개선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왕궁 축산단지 축사매입에 들어갔다. 이 축산단지가 바로 한센인 정착 농장을 일컫는다. 환경부는 그간 총사업비 1,627억원을 투입하여 2023년에 축사매입을 완료하였다. 한편 오늘날 한센인들이 자활․자립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축산업 덕분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익산시가 2023년에 발표한 ‘10대 시정뉴스’에 ‘13년의 대장정을 끝낸 왕궁 축사 매입사업’이 1위를 차지했다. 전국 최대 축산단지 중 하나인 왕궁 한센인 정착 농장 환경개선의 결과로 주택과 축사가 녹색의 숲으로 바뀌고 있어 쾌적한 환경으로 변화하고 있다. 


비록 왕궁 축산단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지만, 그곳에는 한센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70개 양로 주택을 중심으로 244세대 336명이 생활하고 있다. 대부분 기초생활보장수급자이고 평균 80대 나이로서 의료‧복지서비스가 절실한 실정이다. 익산시에서 추진하는 국립 한센인요양병원이 설립되어 전국 8,100여 명과 전북 770여 명의 한센인들도 일반인과 차별 없는 양질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왕궁 한센인 정착 농장은 70여 년간 차별과 소외의 아픔이 서려 있는 유형(流刑)의 땅이었다. 이제 그 어두운 과거를 걷어내고 가장 빛나는 지역이 되길 기대해 본다. 그들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소박한 전시관이라도 설립되었으면 한다.


글쓴이

채수훈<익산시 위생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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