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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儒學)의 본고장 익산시 이야기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4-04-26 09:02:02
  • 수정 2024-04-26 09: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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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산 사람도잘 모르는 익산 이야기3


 익산시에서는 지난 4월 3일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오전 10시에 성균관유도회 전북특별자치도본부가 주최하고, 전북자치도교육청이 후원하는 동양인문학 교실이 열리고 있다. 7월 말까지 익산시 무형문화재 통합전수관 강의실에서 진행되는 이번 강좌는-전북자치도 관내 및 수도권의 유수한 대학에서 동양인문학을 강의했던 학자들로 구성된-실력 있는 강사진이 논어ㆍ맹자ㆍ대학ㆍ중용 등의 고전을 텍스트로 삼아 ‘좋은 학부모 되는 인성교육’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이어간다. 


지난 3일 익산시 향교연합회를 대표해 발언하고 있는 서창원 전교

 그리고 이번 강좌는 전북자치도 교육청이 도내에서 익산시를 우선 시범 지역으로 선정하여 진행하는 행사여서, 익산시가 ‘문화도시’의 위상에 걸맞는 대우를 받는 모양새가 되었다. 따라서 이번 강좌를 유치한 ‘익산시 향교연합회’와 ‘익산시의 유림(儒林)’에 대해서도 시민들의 기대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성리학의 도통서원(道統書院) 죽림서원


 사실 알고 보면 익산시는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유학의 중심 지역이었다. 이는 성리학의 도통서원(道統書院)인 죽림서원(竹林書院)이 전라도 땅인 여산군(礪山郡) 북일면(北一面)에 세워졌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증명이 가능하다. 


현재의 죽림서원은 1965년에 사우(祠宇)를 복원한 것이다.

 죽림서원은 본래 예학(禮學)의 종조(宗祖)인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그의 스승인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학식과 덕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었으며, 처음에는 사당이 세워진 지역인 황산(黃山)의 이름을 따서 황산사(黃山祠)로 불렀다. 

 

※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

성리학(性理學)은 공자(孔子, B.C.551~B.C.479) 이래의 유학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1130~1200. 주자)가 집대성하여 발전시킨 유학을 말하며, 그 이름은 북송(北宋)의 유학자인 정이(程頤, 1033~1107)가 주창한 성즉리(性卽理)에서 나왔다.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는 그 내용이 더욱 구체적으로 실생활에 적용되면서 김장생(金長生, 1548~1631)에 의해 실천 유학인 예학(禮學)으로 정립되었다. 


 도통서원으로서의 죽림서원의 위상은 서원에 봉향된 인물들의 면면으로도 드러난다. 죽림서원에 봉향된 인물들은 모두 여섯 명으로, 앞에서 언급한 이이와 성혼 외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20)ㆍ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ㆍ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ㆍ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다. 이들은 모두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추가하여 봉향하는 일)된 현인(賢人)들이며, 또한 우리나라 성리학의 도통을 계승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묘에 배향된 여섯 명의 현인들을 모셨다는 의미로 육현서원(六賢書院)이라는 별칭과 함께 명실상부한 성리학의 도통서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강경의 미상점(梶商店)이 1920년 발행한 엽서는 1871년 훼철되어 폐허가 된 죽림서원을 황산육선생구적(黃山六先生舊蹟)으로 표기했다.

 그런데 조선시대 서원의 제도와 운영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문묘(文廟)에 배향된 육현(六賢)을 모신 것이 어떻게 도통서원의 조건이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것 같다. 이 의문의 답에 접근하려면 죽림서원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 사액서원은 국왕의 승낙이 있어야 지정이 가능하고, 서원의 운영을 위한 토지·노비·서적 등도 국가가 지원해주기 때문에 서원에 배향할 수 있는 인물 역시 국왕의 승낙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서원에 봉향되는 인물들은 그 지역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慣例)였다. 그런데 여산과 연고가 없는 조광조ㆍ이황ㆍ이이ㆍ성혼 등을 봉향할 수 있었던 것은 김장생과 송시열이 그들을 이어 성리학의 도통을 계승하는 인물들이라는 것을 나라에서 인정한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 문묘(文廟) 배향에 대해서

 문묘는 문선왕묘(文宣王廟: 문선왕의 사당)의 줄임말로 중국 당(唐)나라 때 당태종이 공자를 문선왕(文宣王)으로 추봉(追封)하면서 붙여진 이름인데, 원(元)나라 때 이후부터 문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수(隋)나라 때까지는 국학(國學)의 사당에서 주공(周公)이 선성(先聖)의 자리를 차지하고 공자는 선사(先師)로서 배향(配享)되었는데, 당태종이 유교정치를 표방하면서 공자가 선성의 자리에 모셔지고 안회(顔回)가 선사(先師)로 배향된 것이다. 그 후 송(宋)나라 때 주희(朱熹)가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정통(正統)의 개념을 확립하면서 현재의 향사 제도가 정비되었다. 

그런데 옛말에 “정승 10명이 대제학 1명에 미치지 못하고, 대제학 10명이 문묘 배향 현인 1명에 미치지 못한다(十政丞이 不如一大提學이요, 十大提學이 不如一文廟配享(賢人)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인물로 문묘에 배향된 인물은 신라시대부터 통틀어서 18명뿐이기 때문에 조선의 선비들은 문묘에 배향되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더 큰 영광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죽림서원이 성리학의 도통서원이라는 사실은 역사 기록으로도 증명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자료에서 도통서원이라는 표현은 오로지 여산의 죽림서원에서만 여러 건이 보일 뿐이며 다른 서원의 사례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李○ 曰, 礪山竹林書院(여산 죽림서원), 世稱東方道統書院(세칭 동방도통서원), 

而院儒遵守先正講規, 講習不掇, 斯文之尊仰, 多士之作成, 比他院尤有異焉。...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759년(영조 35) 12월 16일 기사 


# 익산의 인물 김장생과 송시열


송시열의 후손 송병직(宋秉直)의 양해를 얻어 1913년에 만동여학교(萬東女學校)의 교사(校舍)로 사용된 팔괘정.

 앞에서 서원에 봉향하는 대상은 그 지역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고, 특히 사액서원에 봉향하는 인물은 국왕의 승낙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김장생과 그의 수제자인 송시열은 여산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김장생은 1606년 경부터 여산의 황산(黃山)에서 머물렀다. 그곳 황강(黃江: 금강)에서 송이창(宋爾昌, 1561~1627)ㆍ이시직(李時稷, 1572~1637) 등과 뱃놀이를 하며 교유했고, 인조(仁祖) 임금으로부터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 : 전라도와 충청도의 군사모집 및 군량의 책임자)로 임명받은 정묘호란(丁卯胡亂) 시기에도 황산에 막부(幕府: 지휘부)를 설치했다. 


1653년 8월 경 송시열은 금강 상류인 연기(燕岐)에서 배를 타고 내려오면서 유계(죽림서원 1663년 중건 당시 원장)를 방문하여 그를 배에 태우고 화산(花山: 나바위성당이 있는 산)에서 여산군수 권성원(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의 조부), 윤선거(송시열의 정적이 된 윤증의 부친), 은진현감 이정기(李廷夔, 1612~1671) 등과 술을 마시고 즐겼다. 그날 밤 송시열은 황산서원(사액 전의 죽림서원)의 재실에서 자면서 윤선거와 밤늦도록 토론을 했는데, 그 내용은 윤휴(尹鑴, 1617~1680)의 행실에 관한 것이었다. 송시열은 외람되게 스스로를 주자와 비견하는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평가하였지만, 윤선거는 윤휴를 옹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 송시열의 강박(強迫)에 못이겨 마지못해 송시열의 의견에 동조하는 척했다. 그런데 나중에 윤선거가 사망한 후에 송시열은 윤선거가 차마 보내지 못한 편지를 입수해서 읽게 되고 자신이 기만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송시열은 윤선거를 경멸하게 되는데, 이 문제로 인해 송시열의 제자이자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이 송시열을 적대시하게 되면서 서인(西人)은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열하게 된다.


 송시열은 1669년에 스승의 족적이 남아 있는 황산으로 아예 가족들과 함께 이주하게 되는데, 스승을 흠모하는 마음으로 스승이 건립한 임리정(臨履亭)과 마주 보는 곳에 팔괘정(八卦亭)을 세웠다. 또한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여산강(礪山江: 금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권성원(權聖源, 1602~1662)ㆍ유계(兪棨, 1607~1664)ㆍ윤선거(尹宣擧, 1610~1669) 등과 교유하였다. 따라서 두 사람은 여산과 깊은 연고가 있어서 죽림서원에 배향되는 데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익산의 화산서원(華山書院)에서는 그 경우가 달랐다. 

 

2022년 10월 화산서원의 제례 행사를 마친 익산 유림회원들

 화산서원(華山書院)은 익산의 유림이 김장생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해 1654년에 설립하였으며 1662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러나 사액서원이 되는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김장생은 1603년부터 1605년까지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지냈기 때문에 지역 연고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김장생을 봉향한 연산(連山)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이 이미 사액서원이 된 후여서, 김장생을 봉향하는 서원의 사액이 중복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1660년 2월에 현종(顯宗) 임금은 예조(禮曹)에서 사액이 중복 시행되는 문제를 거론하자 이 문제를 김장생의 제자인 송준길(宋浚吉, 1606~1672)에게 물었다. 송준길은 김장생의 스승인 이이(李珥)의 경우에도 해주(海州)의 석담서원(石潭書院)과 강릉(江陵)의 송담서원(松潭書院)에서 중복 시행된 사례가 있음을 아뢰어 화산서원의 사액을 가능케 했다. 


1925년에 훈지당(壎篪堂) 옆 징벽지(澄碧池)에서 찍은 사진 [전북자치도 학예연구관 김승대 박사 소장]

 그런데 송시열을 화산서원에 배향하는 문제는 그가 익산과 연고가 있는 인물이라는 것부터 밝혀야 했다. 송시열의 중형(中兄)인 송시묵(宋時默, 1605~1672)은 1664년에 익산군수로 부임하여 1667년에 진산군수(珍山郡守)로 갈 때까지 재임했고, 아우인 송시도(宋時燾, 1613~1689)는  1666년에 익산군수로 부임하여 1671년 장성부사(長城府使)로 갈 때까지 재임했지만 이런 문제는 송시열을 화산서원에 배향하는 연고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익산의 유학(幼學) 소덕일(蘇德一)ㆍ충청도(忠淸道)의 진사(進士) 이세언(李世彦)ㆍ전라도(全羅道)의 생원(生員) 오두형(吳斗炯) 등은 1694년에 송시열의 화산서원 배향을 청하는 상소문에서, 송시열이 익산에서 약 30리 거리인 황산에 살았는데 익산에도 그의 제자들이 있다는 내용을 연고의 근거로 삼았다. 



후영(後營)과 훈지당(壎篪堂)

송시열이 여산으로 이사한 1669년은 아우인 송시도가 익산군수로 재임 중인 시기였다. 당시에 전라도 5군영 중 후영(後營)이 익산에 있었는데, 송시도는 현종(顯宗) 임금과 독대한 자리에서 후영(後營)을 여산으로 옮겨달라고 청하여 일을 성사시켰고, 당시 뭇 사람들은 송시도가 형의 권력을 이용해 후영을 옮긴 것이라고 평하였다. 

훈지당은 송시도가 선정을 베푼 이시담(李時聃, 1584~1665)을 기려 지은 건물로 징벽지(澄碧池)라는 연못 옆에 있었다. 그런데 건물의 이름인 훈지당은 ‘형이 훈(壎: 오카리나)을 불면, 아우는 지(篪: 피리)를 불어 화답한다’는 뜻으로, 송시열의 형제들이 번갈아가며 익산군수를 지낸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 죽림서원의 옛 모습은 어땠을까?


보물로 지정된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論山 遯岩書院 凝道堂)

 현재 죽림서원의 모습은 아담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처음 설립 당시에는 그 규모가 꽤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 송준길에게 보낸 김장생의 편지와 송시열이 쓴 『돈암서원 묘정비(遯巖書院 廟庭碑)』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김장생이 송준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죽림서원을 건립할 때 비교적 재원이 넉넉해서 《주자대전(朱子大全)》에 나오는 석궁(釋宮)의 내용을 따라 하나하나 그대로 재현하였다는 내용이 있고, 송시열의 『돈암서원 묘정비』에서는 그렇게 원칙을 따라 지은 죽림서원을 그대로 본떠 돈암서원을 지었다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옛 죽림서원의 규모와 모습은 돈암서원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죽림서원의 설계자들 

 

 앞에서 죽림서원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도통서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지만, 현재 죽림서원의 소재지는 익산시는 물론 전라도의 관할 지역도 아니다. 그래서 과연 죽림서원을 익산시의 역사ㆍ문화유산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 속 기록은 죽림서원이 익산시의 역사ㆍ문화유산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죽림서원의 건립부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될 때까지의 모든 기록이 ‘여산 죽림서원’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림서원의 설립 과정을 살펴보면 죽림서원이 익산시의 역사ㆍ문화자원이라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송흥주를 모신 여산의 진천송씨(鎭川宋氏) 목사공파(牧使公派) 재실

 원래 김장생은 익산군수에서 파직된 직후인 1606년 경부터 이미 제자들과 함께 죽림서원의 모델을 구상하고 있었다. 최명룡(崔命龍, 1567~1621)ㆍ송흥주(宋興周, 1581~1652)ㆍ윤운구(尹雲衢) 등의 제자들과 함께 여산의 황산강(黃山江) 가에 집을 지어 강학(講學) 공간을 만들고 아울러 자신의 스승인 이이의 사당을 세우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생각을 같이한 제자들을 보면 최명룡은 김장생이 익산군수로 재직하던 시기에 소세량(蘇世良, 1476~1528)의 증손자인 소영복(蘇永福, 1555~?)에게 소개를 받아 제자로 맞은 전주 출신의 인물이었고, 윤운구는 남원 출신의 인물이었다. 또한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임명된 김장생의 오른팔 격인 부장(副將)을 맡기도 했던 송흥주는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耈, 1556~1620)의 조카로 여산 출신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소영복의 조카인 소명국(蘇鳴國, 1574~?)이 ‘김장생과 최명룡이 정철(鄭澈, 1536~1593)의 사당을 세우려 한다’라고 모함하는 바람에 사당 설립의 뜻을 접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서야 다시 송흥주의 주도로 서원 건립이 진행된다. 그런데 이 과정을 보면 죽림서원의 설립에 참여한 자들은 물론 방해한 자까지 모두 전라도 사람들이고 충청도 사람들은 찾을 수가 없으니 죽림서원은 익산시의 역사ㆍ문화유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죽림서원이 세워진 지역은 조선시대 내내 여산에 속했었고, 죽림서원의 이름 앞에는 항상 여산이라는 지역명이 수식어처럼 붙기 때문에 죽림서원은 여산과 익산시의 역사ㆍ문화유산으로 보는 것이 맞다. 


# 맺는말


 아래 내용은 『디지털논산문화대전』에 소개된 죽림서원에 대한 설명이다.


“충청남도 남부 공주목에 속하였던 논산은 거의 서인계, 또는 노론계의 일색이었는데 죽림서원의 경우 영남학파인 조광조와 이황, 기호학파의 거유인 노·소론의 이이와 성혼, 노론의 조종(祖宗)인 김장생과 송시열이 함께 제향되어 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이황이 어떠한 연유로 서인 및 노론의 대표 인물들과 함께 제향될 수 있었는지 좀 더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 http://nonsan.grandculture.net/nonsan/toc/GC02002374


 영남학파의 인물들이 왜 죽림서원에 봉향되었는지 알 수가 없고,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서술해놓았다. 이 내용은 죽림서원이 ‘성리학의 도통서원’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그 의문의 해답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면서, 논산시가 아직 죽림서원의 존재 가치를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죽림서원의 존재 가치를 모르는 것은 익산시민들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 익산향교의 한 관계자가 필자에게 질문했었다. ‘금마에는 화산서원이나 화암서원이 있는데 왜 여산에는 서원이 없느냐’는 내용이었다. 여산에도 죽림서원(竹林書院)과 봉곡서원(鳳谷書院)이 있었다는 것을 잘 모르셨기에 한 질문이었다. 유림(儒林)의 인사가 그런 질문을 할 정도라면 거의 대부분의 익산시민은 죽림서원의 존재조차 모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물론 죽림서원의 소재지가 익산시가 아니기 때문에, 익산시민이 죽림서원의 존재 가치를 모르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역사와 문화는 일도양단식으로 시공의 경계를 가를 수가 없는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영토가 없었던 히브리 민족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서 역사와 문화가 잊혀지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처럼 우수한 문화는 생명력을 갖고 있다. 중국을 점령하고 다스렸던 여러 이민족은 오히려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었고, 그리스를 정복하고 다스렸던 로마는 오히려 그리스의 문화에 동화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죽림서원을 꼭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글쓴이

최정호<익산근대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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