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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의 진앙지(震央地)는 익산시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4-05-17 09:29:17
  • 수정 2024-05-17 09: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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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동학혁명기념탑 제막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후보 [이미지 출처 : 정부기록사진집]

지난 5월 11일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130년 전 있었던 ‘황토현 전승일’을 기리는 날이었다. 황토현 전승일은 전봉준(全琫準, 1855~1895), 손화중(孫華仲, 1861~1895), 김개남(金開南, 1853~1894) 등을 지도부로 하는 동학농민군이 조직이 관군과 싸워 최초로 대승을 거둔 날을 말한다. 이날을 계기로 농민군의 기세와 혁명의 열기가 크게 높아지면서, 이후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2004년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지만, 혁명정신을 기리기 위한 법정기념일의 지정은 2018년에서야 이루어졌다. 전북자치도 내 지방자치단체의 기념일에 대한 입장이 각기 달랐기 때문에, 문화체육관광부는 기념일 선정을 위해 2017년 2월 선정위원회를 구성하고 4개 지방자치단체의 추천을 받았다. 전주시는 전주화약일(6월 11일)을, 고창군은 무장기포일(4월 25일)을, 정읍시는 황토현 전승일(5월 11일)을, 부안군은 백산대회일(5월 1일)을 추천했는데, 공청회를 거친 후 역사성·상징성·지역참여도 등의 선정 기준에 따라 황토현 전승일을 기념일로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동학농민운동이 ‘동학난’이라는 오명을 벗고 혁명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황토현 전적지에서 시작되었다. 



# 가람 이병기, 갑오동학혁명기념탑 건립추진위원장이 되다


1963년 10월 3일 오후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에서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제막식이 있었다. 이 기념탑의 건립은 최초 발의한 1963년 7월부터 불과 3개월도 되지 않아서 준공(竣工)되었다. 최초로 의견을 낸 사람은 전북일보 이치백 기자였고, 그 제안을 수용한 인물은 김인(金仁) 전라북도지사였는데, 당시는 5.16정변으로 들어선 군사정권 치하였으므로 현역 준장이 전라북도지사였다. 또한 이치백 기자에게 영감을 준 인물은 김제시 백산면 출신의 동빈(東濱) 김상기(金庠基, 1901~1977) 박사였는데, 그는 와세다대학에서 ‘동학난(東學亂)’이라는 제목으로 졸업 논문을 쓴 인물로, 동학을 ‘민중혁명’으로 재평가한 학자였다. 


그래서 김인 도지사의 승인이 있은 후 이치백 기자는 문필병(文弼炳) 전라북도 공보실장, 황의선(黃義善) 농협 도지부장, 유범수(柳凡秀) 정읍군수와 함께 모여 갑오동학혁명기념탑 건립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건립 기금은 전라북도, 전북농협, 정읍군이 각각 100만 원씩 내놓고, 나중에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100만 원을 더 보태서 400만 원이 마련되었다. 자장면값이 25원이었던 시절이었는데, 꽤 큰 거금이 순식간에 마련된 것이었다. 다른 문제들도 군대 작전처럼 빠르고 거침없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으며, 건립추진위원회의 조직 구성 역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추진위원으로는 유범수 정읍군수, 문필병 전라북도 공보실장, 이치백 기자가, 고문에는 김인 전라북도지사, 김상기 서울대 명예교수, 이홍직(李弘稙) 고려대 교수가, 부위원장에는 황의선 농협 전라북도지부장, 박용상(朴龍相) 전북일보 사장, 황면주(黃冕周) 전주지법 부장판사 등 각각 3인으로 정했다. 그리고 추진위원장으로는 이치백 기자의 의견을 따라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선생을 추대하기로 했다. 


이렇게 ‘갑오동학농민혁명탑’ 건립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제5대 대통령 선거일을 12일 앞둔 10월 3일에 수만 명의 군중이 모인 황토현 현지에서 제막식 행사를 치렀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박정희 의장과 이병기 추진위원장이 나란히 서서 탑을 가린 장막을 걷어내는 제막(除幕) 퍼포먼스였다. 그리고 이 행사가 있은 후 12일 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선거 기간 내내 ‘빨갱이’라고 공격받던 박정희 후보가 경쟁 상대였던 윤보선 후보를 1.55%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 호남 동학의 최초 포교지, 미륵산 사자암


‘가람 이병기(이하 가람)’는 어떤 연유로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의 건립추진위원장에 추대되었을까? 필자의 견문이 얕아서인지 가람이 동학 또는 천도교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내용은 아직 찾지 못했다. 굳이 관련을 짓자면 『동학사(東學史)』의 저자인 원암(源菴) 오지영(吳知泳, 1868~1950)이 가람의 부친 이채(1868~1948) 선생이 임원으로 있던 호남학회(湖南學會)의 회원이었다는 정도이다. 그러므로 가람이 건립추진위원장으로 추대된 이유는 그가 대학자이자 전라북도의 큰 어른이라는 상징성 때문이었을 것 같다. 


최시형이 본격적인 호남의 포교를 시작한 사자암은 이병기 생가와 가까운 곳이다. ⓒ최정호

그런데 가람이 태어나기 7년 전에 가람의 생가에서 산 하나를 사이에 둔 사자암(獅子庵)에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이 머물고 있었다. 최시형은 단양(丹陽)에서 순도의례(巡道儀禮)를 거행하다 단양 관아로부터 압력을 받자 고산(高山)의 교도(敎徒)인 박치경(朴致京)의 주선으로 1884년 6월 익산의 사자암에 은거하였다. 그리고 훗날 전봉준, 손화중과 더불어 동학농민군의 지도자가 되는 김개남은 당시 임실군 청웅면에서 훈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사자암을 방문해서 최시형을 만나고 동학에 입도했다. 최시형은 4개월간 사자암에 머물며 호남지방 포덕(布德: 전도) 계획을 세웠고 이는 호남지방에 동학이 확산 되는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천도교서(天道敎書)』, 포덕25년조(布德25年條)

단양 관아로부터 지목받게 된 최시형은 1884년 6월, 전라도 익산 금마면 미륵산 동쪽 계곡의 단신으로 사자암에 들어갔다.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 1926년 9월호

사자암에서 4개월간 머문 최시형은 본격적인 호남지방의 포덕을 진행했다.

『동학학보』 제51호 20~21쪽. 「전라북도와 전주 일대의 동학 포덕 과정에 관한 연구」

김개남은 당시 임실군 성밭(청웅면 향교리)에서 훈장을 하고 있었는데 사자암을 직접 찾아와 인도하였다고 한다.


# 동학농민군에게 도움을 준 여산부사 유제관


‘동학농민군에게 도움을 준 여산부사 유제관’ 관련 문서. [동학농민혁명박물관 소장] ⓒ최정호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는 동학농민혁명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문서들의 설명 중에 특별히 눈에 띄는 내용이 있는데, 여산부사(礪山府使) 유제관(柳濟寬)이 동학농민군에게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 당시 농민군 진압을 위해 특별히 구성된 일본군후비보병 제19대대 대대장이던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가 작성한 “여산부사 유제관의 죄상”이라는 보고서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여산부사 유제관은 전봉준의 영칙에 의거하여 세미 3백여석을 독촉하여 군량미로 보태 사용하였으며, 짚신 3천여 켤레를 거두어들여 (동도의) 군수용품으로 조달하였다. 그리고 그 고을의 접주 겸 집강인 윤일봉과 더불어 속내를 터놓고 교제하였으며, 전봉준의 적도가 삼례에 주둔하고 있을 때 빈번하게 내왕하였고, 같은 고을의 괴수 장달원, 최난선, 오광신, 윤일봉 및 이름을 알 수 없는 진가 놈이 경내에 머무르고 있는 데도 그를 방치하고 체포하지 않았으며, 전봉준이 경계를 지나갈 때 소 7마리를 잡아 (농민군들에게) 먹였다” 


익산시가 펴낸 익산학총서 중 『총쇄록(叢0錄)』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유제관은 전남 구례 출신의 인물로,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첫 장에서도 그 이름이 나온다. 영화 ‘관상’의 소재로 삼은 인물이라는 전설적인 관상가 박유붕(朴有鵬, 1806~1869)의 최후를 지켜본 목격담을 황현에게 들려준 인물로 소개되는 것이다. 박유붕은 흥선대원군에게 그의 아들 명복(命福)이 훗날 왕이 될 것을 미리 알려줬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박유붕이 살던 건물 앞으로 천도교 수운회관이 들어섰다.


 그런데 당시 여산부사는 전라도의 5군영 중 후영(後營)을 책임지는 군사 책임자였고, 더욱이 유제관은 1894년 9월 29일[양력 10월 27일]에 우영장(右營將)인 나주목사(羅州牧使) 민종렬(閔種烈)과 함께 호남지역의 군사 모집을 책임지는 호남소모사(湖南召募使)로 임명된 상태였다. 


김학진이 쓴 낙영당(樂英堂)의 부양루기(扶陽樓記) ⓒ최정호

 또한 이 시기에 동학농민군과 싸우기 위해 조직된 민보군(民堡軍)을 지휘하던 공주(公州) 유생(儒生) 이유상(李裕尙)과 전임(前任) 여산부사 김원식(金源植)은 전봉준을 찾아가 동학농민군에 자진 합류했다. 게다가 전주화약(全州和約) 이전에는 여산 후영(後營)의 군사들을 모아 삼례에서 동학농민군과 대치했던 전라감사 겸 병마절도사 김학진(金鶴鎭, 1838~1917)이 동학농민군의 식량을 조달해주는 운량관(運糧官)의 역할을 맡았다. 동학농민군과 싸워서 물리쳐야 할 양반과 관리들이 동학농민군 편에 선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익산역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낙영당(樂英堂)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앞에는 척화비(斥和碑), 뒷편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여산부사 유제관의 선정비(善政碑)이다. ⓒ최정호

# 낙영당(樂英堂)과 백산서원(柏山書院)


 낙영당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1876년 건립한 건물이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 1848~1907) 등 일제침략기에 의병을 일으킨 대부분의 우국지사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송병선이 당대의 유림(儒林)을 대표하는 좨주(祭酒)였기 때문이다. 


좨주(祭酒)는 성균관에 속한 조선 후기의 관직명이다. ‘학행이 다른 자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사람’을 뽑으라고 법전에 명시되었기 때문에, 학식과 덕행을 모두 갖춘 유림(儒林)의 상징적 인물이 선정되었다.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이 초대 좨주,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2대 좨주이고, 송시열의 9대손인 송병선이 마지막 좨주이다.


어진화사(御眞畵師)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그린 익산시 모현동 백산서원의 송병선 선생과 정동식 선생의 영정. 정동식 선생의 부친인 정제호(鄭濟鎬)의 묘표(墓表)를 송병선이 썼으며, 7대조인 정숙주(鄭叔周)의 묘표를 송병선의 9대조인 송시열이 썼다. [백산서원 소장] ⓒ최정호

 한일합병에 항거해 자결한 모은(慕隱) 정동식(鄭東植, 1868~1910) 선생도 이곳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동식과 송병선의 인연은 정동식의 6대조인 백봉(栢峰) 정상룡(鄭尙龍, 1643~1709)과 송병선의 9대조인 송시열 때부터 시작된다. 정상룡은 1675년(숙종 1)에 전라도와 충청도의 유생 70여 명과 함께 송시열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미움을 받아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정상룡의 부탁으로 그의 부친인 정숙주(鄭叔周, 1607~1665)의 묘표(墓標) 글을 지었고, 그의 9대손 송병선은 정상룡의 5대손이며 정동식의 부친인 정제호(鄭濟鎬, 1821~1897)의 묘표 글을 지었다. 


송병선은 을사늑약(乙巳勒約)에 항거해 자결했으며, 정동식은 경술국치(庚戌國恥)에 항거해 전주 공북루(拱北樓)에 목을 매 자결하였다. 앞서 언급한 황현(黃玹)과 송병선의 아우인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1839~1912)도 경술국치에 항거해 송병선처럼 아편 덩어리를 삼켜 자결하였다. 이제 송병선은 정동식과 한 공간에 있다. 익산시 모현동의 백산서원은 송병선을 주벽(主壁)으로 봉향(奉享)하고 연일정씨(延日鄭氏) 문중의 인물들을 배향(配享)하고 있다. 

 

# 동학농민군, 의병(義兵)으로 거듭나다


 송병선의 숙부이자 스승이기도 한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1818~1903)도 송병선에 앞서 좨주를 지냈고, 서정순(徐正淳, 1835~1908)과 함께 순종(純宗)의 종묘(宗廟)에 배향된 인물이다. 어떤 인물이 종묘에 배향된다는 것은 왕이 당대에 가장 신뢰하고 의지했던 인물이라는 뜻이기에 조선시대 선비에게 있어서는 문묘(文廟)에 배향되는 것 다음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1973년 11월 우금치 전적지에 건립된 동학혁명위령탑(東學革命慰靈塔) 뒷면 사진이다. 당시 천도교 교령 최덕신(崔德新, 1914~1989)이 쓴 감사문 내용 중 일부가 지워졌는데, 숭고한 동학혁명 정신의 뜻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을 항의하는 공주시민들이 ‘4.19혁명 기념 마라톤’ 행사를 하면서 지운 것이다. 최덕신에 이어 차기 교령이 된 오익제(吳益濟, 1929~2012)까지 최고 지도자 두 사람이 월북한 이후 천도교의 교세는 급격히 쇠락하였다.ⓒ최정호


 


최시형의 손자 최익환(崔益煥, 1913~1999) 천도교 종법사의 청년 시절 사진. [홍정자 장로 소장] ⓒ최정호


그런데 그토록 국왕의 신뢰를 받는 송근수의 아들이자 송병선의 사촌인 송병서(宋秉瑞, 1839~?)가 동학농민군의 군수품을 마련하는 일을 담당했다. 흥선대원군이 보낸 전 교리(校理) 송정섭(宋廷燮, 1855~?)을 통해 고종 임금의 밀지(密旨)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갑오왜란(甲午倭亂: 1894년 경복궁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한 사건)으로 조선의 국왕이 사실상 일본군의 포로가 되고 친일 정권이 수립되자 조선 왕실은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유림은 물론 동학의 지도자들에게까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요청한 것이다. 


동학 지도자들은 고종 임금의 요청에 응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낡은 부조리(不條理)를 혁파(革罷)하기 위해 일어났던 1차 봉기 때와는 또 다른 상황이었다. 이번에는 척왜(斥倭)를 위한 창의(倡義)라는 선명한 대의명분이 있었고, 국가의 운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닥친 상황이었다. 동학의 최고 지도자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은 동학교도들의 총 기포령(起包令)을 내려 척왜투쟁(斥倭鬪爭)을 독려했다. 최시형의 지시에 따라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北接)의 농민군과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南接) 농민군이 논산(論山)에서 집결했다. 그들은 조직을 정비하고 하나로 힘을 모은 후 서울로 가는 길목이자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公州)로 진격했다. 

 

# 맺는 말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 때 조선 왕실의 밀사들이 동학의 지도자들과 접촉했었다는 내용은 그 후손들조차 잘 몰랐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 그와 관련된 문서들이 하나둘씩 발견되면서 당시의 동학혁명 지도자들이 조선 왕실의 요청에 부응하여 창의(倡義)한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대둔산 깊은 계곡 속에 있는 동학농민군의 최후 항쟁 터 ⓒ최정호

 그렇다면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 때 참여한 사람들은 의병(義兵)으로 봐야 한다. 당시 동학농민군에 참여한 인물들이 1919년 3.1운동 때도 적극적인 활동을 보인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합당한 대우와 보상을 해줘야 한다. 그들과 그 후손들은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동학농민군에 참여한 사실을 감추려 했고, 또 시간이 많이 흘러서 계속 잊혀져 가고 있다. 


우리는 미국이 아직도 6.25전쟁 때 전사한 미군(美軍)의 유해를 찾는 것을 알고 있다. 세계 각국에 나가 있는 미군 병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수 있는 것은 이처럼 그들이 전사한 후에도 국가가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을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약 1년 전인 2023년 5월 18일 동학농민혁명 기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하지만 동학혁명의 진앙지(震央地)인 익산시에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기념물이 거의 없다. 이것은 익산시와 인접한 논산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는 황화대(皇華臺)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는 여산의 동학 접주 최난선(崔鸞先)이 이끄는 1,000여 명의 지원군이 참여했다. 하지만 그 혈전(血戰)의 현장에는 이제 그들을 기억할 만한 흔적이나 표식이 전혀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잊지 말자! 그들에게는 잊히지 않을 권리가 있다!


글쓴이 

최정호<익산근대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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