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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4·4 만세운동의 주역 문용기 열사는?
  • 조도현
  • 등록 2015-04-08 10: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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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산투데이
▲  문용기 열사  ⓒ익산투데이

 

3.1 운동 연장선에서 벌어진 익산의 4.4 만세운동, 그 중심에는 문용기 열사가 있다. 지난 4일 광복 70년을 맞이한 뜻 깊은 시점에 문용기 열사의 동상 제막식이 역사의 현장에서 개최되었다. 익산의 4.4 만세운동은 어떻게 벌어졌으며 문용기 열사는 어떤 인물일까?

 

1878년 익산시 오산면 관음부락 태생인 문용기(일명 문정관) 장로는 남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24세 때 영명학교 한문교사로 부임한다. 이후 전남 목포와 함경도 갑산 등지에서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을 펼치다, 3.1운동이 벌어지자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중 41세 나이로 순국했다.

 

그는 남전교회 교인이자 도남학교 교사로 재직했으며, 그의 모친과 대대로부터 여러 친척들이 남전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현재 주현동 105-19번지에 있는 순국열사비는 1919년에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출신지인 오산면 소재지에는 순국열사기념비, 익산역 광장에는 삼일운동기념비가 각각 세워졌다. 1977년에는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됐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남전교회는 오산면 남전리에 소재한 교회로 1897년 10월에 세워진 익산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당시 익산은 김제평야와 함께 일제의 식량수탈의 거점지역이었으며 구시장(현 남부시장) 대교농장에는 곡식창고가 있었다.

 

익산 4.4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의 독립만세 운동과 같은 맥락의 운동이다. 익산 구시장(현재 남부시장) 대교농장 앞에서 당시 남전교회 성도였던 문용기 장로, 박영문, 장경춘, 서정만, 박도현 등 성도들과 교회에서 운영하던 도남학교 학생 등 200여명이 함께 시작했으며 장날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합류하여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장날인 4월 4일 정오에 비밀리에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시위대는 장터 네거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일본군은 시위 군중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고 곤봉과 갈고리로 무장한 수백 명의 소방대원과 농장원들 까지도 시위 군중들에게 닥치는 대로 폭행을 가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문용기 장로 등 6인이 일경에게 항거하다 그들의 칼에 쓰러졌고 수십여 명이 부상당하였으며 39명이 검거되었다.

 

1919년 전주지역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던 부위렴 선교사는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보고서에서 남전교회의 교인들의 4.4 만세운동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익산 시민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1949년 당시 이리 시민 일동 명의로 남부시장 중국학교 앞에 순국열사비를 건립하여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비의 순국열사비(殉國士碑) 휘호는 문 열사와 인연을 갖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다.

 

지금은 이 비의 전후면 아래쪽과 후면의 많은 글자가 훼손되어 있다. 이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이 몰락할 때 이승만의 친필 휘호라는 점이 작용된 결과이다. 이 비 외에 오산 면 사무소 안에도 순국열사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의 충혼비가 세워져 있다.

 

지난 2002년 익산시는 남부시장 순국열사비 주변을 공원화 했다. 그리고 이번 광복 70년을 맞이하면서 문 열사의 동상을 드디어 제막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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