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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歷史)로 남은 역사(驛舍), 춘포역
  • 김달
  • 등록 2015-07-01 10:37:00
  • 수정 2015-07-01 12:4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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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통일, 무궁화 이 세 단어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2000년도 초반까지 운행되었던 열차(기차)의 등급을 지칭하던 단어들이다. 완행열차로도 불렸던 비둘기호는 파란색 기차로, 통일호는 녹색기차로, 현재도 운행되고 있는 무궁화호는 빨간색기차로 우리의 기억에 존재하고 있다. 

비둘기 호는 2000년에 퇴역하였고, 통일호도 2004년 KTX의 등장으로 퇴역하게 된다.

열차에 몸을 실고 달리다 보면 그냥 스쳐지나가는 역들이 눈에 많이 띈다. 과거에 역의 기능을 건실하게 수행했을 간이역들이다. 




# 가장 오래된 간이역

익산시 춘포면에 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간이역이 있다. 바로 춘포역이다. 춘포역은 1914년에 지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로 슬레이트를 얹은 박공지붕의 목조 구조 건물로 전형적인 일제강점기 철도 역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춘포역은 원래 대장역(大場驛)으로 불렸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들이 넓다고 큰 대(大), 마당 장(場)자를 써서 ‘대장촌’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만들어진 ‘대장역’이란 이름은 광복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인 1995년에 익산시민연합 공동대표였던 현 박경철 시장이 일제잔재물 청산의 일환의 ‘춘포면 대장촌리’란 지명을 ‘춘포면 춘포리’바꾸어야 함을 주장하여 지명이 ‘춘포리’로 바뀌면서 1996년 역의 이름도 ‘춘포역’으로 바뀌었다. 

그 후, 전라선 복선전철화 사업으로 2011년 5월 폐역되어 지금은 역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건축학적, 역사적, 철도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11월에 등록문화재 제210호로 지정되었다.





# 아픔의 역사를 품은 역사

춘포에 간이역이 세워진 이유는 이곳이 곡창지대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치르기 위한 물자 중 하나로 쌀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일본은 토지조사를 완료한 후 제방공사를 통해 농경지를 만들었다. 후에, 일본인들 하나 둘 씩 모이기 시작했고, 농장을 만들었다. 농사를 짓기 위한 물자와 마을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항으로 운반할 수단이 필요했다. 그렇게 춘포역이 만들어졌다.

우리 한국농민은 일본인 대지주 아래 하루 품삯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돈을 받으며 힘들게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쌀은 수레로 농장에서 역으로 날라졌다.

춘포역도 일제수탈의 역사를 피할 순 없었다. 





# 사랑방 같은 역사

춘포역은 춘포사람 뿐만 아니라 만경강 건너에 있는 백구(김제)주민 등 인근 마을사람들도 자주 이용하였다. 학교를 이리(익산)으로 다니는 학생들은 춘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다녔다. 이리(익산)나 삼례에 장이 서는 날에는 물건을 사고 파기 위해 장으로 가는 사람들로 역사 안은 더욱 붐볐다. 전주를 가거나 서울을 갈 때도 춘포역을 이용하였다.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간식거리를 나누며 그렇게 정을 나누었다. 춘포역은 근방 사람들의 사랑방 같은 존재였다. 

1993년도, 비둘기호 승차권 발매 중지되었고 2005년엔 역무원이 배치되지 않는 간이역 격하되고 6년 뒤인 2011년 5월에는 전라선 복선전철화 사업으로 폐역되었다. 

더이상 춘포역에서 기차의 기적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더욱이 100년 동안 열차의 길이 되어준 철길도 모두 철거되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매우 안타깝다.

역사의 아픔과 정겨웠던 사람 냄새를 고이 간직한 곳, 그래서 인지 새로 난 복선철로 앞으로 우둑하니 서있는 춘포역은 정겹지만, 쓸쓸한 느낌이 든다. 춘포역과 함께 세월의 인고를 견딘 역사(驛舍) 앞의 옥향나무가 그 쓸쓸함을 달래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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