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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의 독립만세운동과 두 분의 인물

기사 등록 : 2019-02-19 10:00:00

문명균 기자 art33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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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경호 익산시의원(중앙·평화·인화·마동)   ⓒ익산투데이
▲ 장경호 익산시의원(중앙·평화·인화·마동)   ⓒ익산투데이

2019년은 우리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며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일제에 항거하여 전국방방곡곡에서 자주독립을 외치던 3·1만세운동의 100주기가 되는 해이다.

 

그 당시 우리 익산에도 전주와 옥구지역을 통해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어 천도교와 예수교를 중심으로 여러 면지역에서 전개되었다고 한다.

 

독립운동사를 인용하면 3월 10일을 기점으로 익산의 각 면과 리에서 만세운동이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졌으며, 이후에도 3월 18일과 28일에는 금마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한 수백 명의 만세시위가 있었고 춘포에서도 3월 28일에 수백 명이 모여 춘포면 일대가 만세소리로 가득찼다고 기록하고 있다.

 

1912년 철도가 개통되어 호남의 대표적인 교통의 요충지로써 상거래활동의 중심지였던 이리역(현재 익산역)앞은 인근지역으로부터 상인들의 왕래가 활발하였던 공간이었으며 3월 26일 이리역 앞에서도 수많은 인파가 몰리며 승객들과 군중들의 만세소리가 우렁차게 터져나왔다고 전하고 있다.

 

이 후 4월 4일 만세운동을 이끌며 순국하신 문용기 열사는 익산군 서일면 관음리(현 오산면 오산리 관음마을)출생으로 24세라는 늦은 나이에 군산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였고 30세가 되던 1908년에 미국의 기독교선교회에서 개설한 짠 왓킨스중학교를 졸업을 하게 된다.

 

졸업 이후에 미국인이 운영하는 함경도의 광산에서 통역사로 일하다가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급거 귀향하여 뜻있는 분들과 고향에서의 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된다.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문용기열사를 비롯한 수천 명의 군중들은 솜리장터(인화동 구시장)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으며 왜경에 의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4·4 만세운동을 기념하고 열사의 순국을 기리기 위해 현재 주현성당 옆에는 문용기열사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순국당시 입었던 의류는 독립기념관에 보관이 되어있다.

 

익산시민인 우리가 3·1만세운동 100년을 맞아 주목해야 할 인물 중 삼산 김병수선생도 있다.

 

그는 전북 김제군 백구면 유강리 출생으로 군산 영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졸업 1년을 앞둔 1919년 2월26일 독립선언문을 군산에 전달하여 군산의 3·5대규모 만세시위를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또한 서울남대문정거장에서 수백 명의 군중을 이끌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3개월을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21년에 의전을 졸업하고, 군산 야소교병원을 거쳐 다음해 익산에 삼산의원(三山醫院)을 개원하여 인술을 베풀고 사재를 털어 광희여숙을 설립하여 여성교육에도 공헌하였다. 또한 1947년 이리읍이 이리부로 승격되면서 초대 이리부윤을 지내기도 하였다.

 

1922년 개원한 삼산의원은 근대건축물로써의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180호로 지정이 되었으며 지금은 기존에 위치에서 영정통이라고 불리웠던 거리로 이전 공사 중이며 올 해 3월 20일경에 복원을 마치고 개관을 앞두고 있다.

 

대한민국의 자주독립만세운동 100주기를 맞아 익산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문용기 열사의 동상과 김병수 선생이 개원했던 삼산의원을 찾아 그분들을 기억하는 시간들을 보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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