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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의 근대역사가 펼쳐진 그 배후지를 찾아서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2-07-14 08:22:24
  • 수정 2022-07-14 11:3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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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일 오후 익산근대문화연구소(소장 신귀백 박사)의 회원들은 ‘지역 바로알기 답사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김제시 백구면과 용지면 등 익산시 주변에 있는, 익산시의 근대역사가 펼쳐진 그 배후지들을 탐방하는 기회였다.


답사 순서는 먼저 김제시 백구면 유강리 537(백구면 번영로 2055)에 있는 만경강문화관에 들러 만경강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개괄적으로 훑어본 뒤에 유강리 130(유강11길 43)에 있는 치문초등학교와 영상리 56(번영로 2896)에 있는 호소카와 은덕비를 살펴보고, 용지면 산28(용지로 9-1)에 있는 실향민역사문화관까지 둘러보고 오는 일정이었다.


답사에 참여한 12명의 회원들은 첫 번째 목적지인 만경강문화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답사 당일은 모든 박물관들이 휴관하는 월요일이었기 때문에 만경강문화관 앞에 있는 구 만경강교의 교각이 새 목적지가 되었다.

 

                 만경강직강화 공사에 대해 설명하는 ‘만경강 이야기’ 저자 이종진 회장

 

# 우리나라 최초 콘크리트 다리 만경강교


너비 6m에 길이가 555m인 옛 만경교는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모든 다리 중에서 가장 먼저 건설된 콘크리트 다리로서, 단기 4261년(1928년) 2월 준공되었으며, 당시 화폐 가치로 28만 환이 소요되었다. 


이 만경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작로이자 최초의 포장도로인 군산-전주 간 도로의 만경강을 건너는 구간에 설치된 것으로 우리나라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 정책과 수탈의 역사는 물론 6.25전쟁의 상흔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만경교는 해병대가 창설된 후 최초의 작전을 펼쳤던 장소였고, 전쟁의 참상을 그린 윤흥길 작가의 작품 ‘기억 속의 들꽃’의 무대이기도 한 것이다.

 

                            김연식 선생의 고택에서 함께 한 익산근대문화연구소 멤버들

 

그런데 이 다리의 남쪽 방향은 물론 익산시 방향의 북쪽 교각까지 모두 김제시에 속한 행정구역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일반 시민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일제가 농업용수의 확보와 홍수피해 예방을 위해서-마치 긴 뱀이 또아리를 튼 것처럼 구불구불하게 흐르던 만경강을-새로 제방을 쌓아서 물길을 바꾼 사실이 이미 눈에 익숙해진 풍경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의욕적으로 익산시의 근대사를 살펴본 사람이라면 현재 익산 시내 상권의 일정 부분이 만경강 제방을 쌓을 때 들어온 중국인 노동자들의 후손들 및 6.25전쟁 때 월남한 실향민들의 후손들에 의해 일궈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경강의 직강화공사 흔적은 지금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데 그 흔적 중 하나가 바로 만경강문화관 주자창 입구에 있는 옛 만경강의 물줄기이다. 이 물줄기는 백구면 유강리와 공덕면 동계리의 경계 지점인 동화주유소 부근까지-현재 만경강이 흐르는 방향과 거의 직각을 이루며-남쪽으로 흘렀는데 그 남단 부근에는 지금도 조선시대의 지명인 율포(栗浦: 밤개)라는 마을 이름이 남아있어서 흘러간 역사의 물줄기를 놓지 않고 있다.

 

# 치문초등학교와 율포 일대 농토 개간 김연식 선생


만경강 직강화 공사로 제방이 축조되면서 노전백리(蘆田百里)로 불리던 옛 강 유역의 늪지는 더 이상 바닷물이 침범하지 못하는 옥토가 될 수 있었는데 율포 일대의 지역을 농토로 개간한 인물이 김연식 선생이다.

 

                                              치문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신익희 선생의 휘호

 

김연식 선생은 대한제국 시기에 목연면장(木淵面長)을 지낸 부친 김장호(金漳昊)의 뒤를 이어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행정구역 명칭이 바뀐 백구면(白鷗面)의 초대 면장을 지내고, 민선으로 선출된 전라북도 도의원을 지냈으며, 백구금융조합을 설립한 당대의 지역 유지였다. 


그 김연식 선생 집안에서 설립한 김제시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백구면 유강리의 치문초등학교가 회원들의 두 번째 답사 목적지였다.


치문초등학교의 이름은 학교의 설립을 위해 사재를 출연(出捐)한 김장호 선생의 호 치문(致文)을 딴 것으로 1908년 개교 당시의 이름은 원래 신명학당(新明學堂)이었지만 일제의 교육 행정 지침에 따라 치문보통학교(致文普通學校)로 바꾸게 되었다. 


신명학당은 군산을 근거로 선교 활동을 했던 전킨 선교사의 활동에 영향을 받아 김장호 선생의 결단 아래 그의 아들인 김홍식ㆍ연식 형제가 설립했는데, 초대 이리부윤을 지낸 김병수 선생이 신명학당 출신으로 설립자인 홍식ㆍ연식 형제는 김병수의 당숙이다. 


그리고 군산의 3.1운동을 주도한 박연세 선생은 신명학당 및 군산의 영명학교에서 김병수를 가르친 스승으로, 나중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이리 고현교회와 황등 동련교회에서 시무하는 등 익산시와 호남의 교회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기게 된다.


회원들은 우선 치문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육영기념탑을 참배했다. 김제시 최초의 신학문 교육기관을 설립했고 또 일본제국대학과 같은 수준의 고등교육기관을 우리 민족의 힘으로 세우자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앞장선 김연식 선생의 공로를 치하하는 신익희 선생의 휘호가 새겨진 기념탑이다.


김연식 선생이 살던 집에서 대를 물려 살고 계신 며느님인 홍정자 선생님의 설명에 의하면 신익희 선생은 김연식 선생과 매우 각별한 사이였고, 그래서 신익희 선생이 서거했을 때도 김연식 선생이 장례위원장을 맡았었다고 한다.

 

1946년 익산 김제지역을 방문한 김구 선생의 모습. 오른쪽이 김병수 선생(홍정자 사진제공)

 

홍정자 선생님이 보여주신 사진 자료와 기록물들에는 김구 선생을 비롯한 당대의 거물 정치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있었는데,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홍정자 선생님의 외가가 동학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가문이라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홍정자 선생님의 사진 앨범은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압축해놓은 듯한 귀중한 자료철이었다.

 

# 최근 존재 드러낸 김제 백구 호소카와 선정비


회원들의 세 번째 답사 목적지는 일제강점기 대장촌에서 거대농장을 경영한 호소카와 은덕비가 있는 김제시 백구면 득자마을이었다. 1917년에 세워진 이 비석은 득자마을 경로당의 도로 건너 맞은편에 있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주택의 담장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존재를 모르고 있다가 주택이 철거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비문의 앞면에 새겨진 큰 글자의 내용은 후작세천호립공은덕비(侯爵細川護立公恩德碑)와 야고안공인산기념비(野尻安公仁散記念碑)로 호소카와 농장의 주인이었던 호소카와 및 농장 관리인이었던 노지리 야스시(野尻安)의 은덕을 기리는 내용인데, 수탈자를 찬양하는 비석이라니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호소카와 은덕비의 비문은 연름주궁선적(捐廩賙窮善蹟)이라는 내용으로 시작되고, 또 이 비석이 세워진 시기와 가까운 1917년 6월 24일의 매일신보 기사 내용을 볼 때 비석에 새겨진 은덕의 내용은 호소카와의 구휼활동을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뒷면에는 공덕비를 세운 사람들의 이름으로 김0홍 김0, 孫0仲, 이0동, 황0선 등의 이름이 있었다.

 

                                                 김제 백구면의 호소카와 선정비

 

호소카와 모리다치(細川護立)는 1904년 당시 15만 원 거금을 투자하여 춘포에 농장을 개설한 후, 1913년에는 약 1,200정보(약 360만 평)의 토지를 소유한 거대 지주가 되었고 후일 그의 손자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는 패전 이후 최초로 비자민당 출신의 일본 총리가 된다.


또한 비석의 뒷면에 새겨진 내용을 볼 때 그 구휼활동의 혜택을 입은 지역은 백구면ㆍ용지면ㆍ조촌면ㆍ이서면 등에 걸쳐 꽤 넓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비석의 발견으로 전라북도에는 구마모토(熊本)ㆍ하시모토(橋本)ㆍ호소카와(細川) 세 농장주의 공덕비가 세워졌었음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런 구휼활동의 미담은 일제가 우리 민족의 자산과 국권을 수탈ㆍ착취하면서 입힌 계산할 수 없는 피해와 상처에 비하면 창해일속(滄海一粟)조차도 될 수가 없을 것이다.

 

# 피난민들의 정착지 김제 용지 황토마을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해 본국으로 물러간 후 그들의 흔적은 서서히 지워졌지만,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6.25전쟁이 일어났고 그 상처는 백구면 일대에도 깊게 새겨졌다.


6.25전쟁으로 월남한 피난민들이 일제가 남긴 적산(敵産) 토지에 정착하면서 피난민촌들이 형성된 것이다. 백구포도의 산지로 유명해진 부용리와 월봉리 일대의 농장마을은 피난민들의 정착지가 된 곳으로, 가진 것 없이 내려온 피난민들이지만 그나마 그 중에서도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자리 잡은 곳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그보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큰길가에서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그 곳이 바로 용지면의 황토마을이고, 이곳이 근대문화연구소 회원들의 당일 답사코스 중 마지막 목적지였다.


6.25전쟁 때 피난민의 이동 경로는 크게 세 방향으로 나뉘는데 서해안ㆍ중부ㆍ동부 방면 등이었다. 그 중에서 서해안은 평안도와 황해를 비롯한 경기 일원의 도서와 문산 서북지대 혹은 옹진 도서와 인천을 경유한 해로가 중요한 경로였다. 중부지대의 경우에는 원산을 경유한 육로, 동부지대는 주문진을 경유한 해로가 중요한 경로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서해안은 주요 항구도시인 군산과 목포를 중심으로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도내에 3만5천 명을 보내고 제주도에도 5만 명을 보낸다는 계획이었다 한다.

 

                         김제시 용지면 황토마을에 자리한 실향민 역사문화관

 

실향민역사문화관이 있는 김제시 용지면 황토마을의 피난민들은 주로 황해도에서 오신 분들로, 입이 크게 벌어져서 ‘아구리배’라고도 불렀던 미군 상륙함 LST를 타고 와 군산항에서 내린 뒤 이곳으로 들어오게 됐다. 


이제는 6.25전쟁도 휴전협정 후 약 70년이 경과되었기 때문에 각 지역의 피난민 정착촌의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 이미 두 번이나 세대가 교체되었으며 초기 정착민들은 생존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하지만 도시화의 물결이 쉽게 닿을 수 없었던 용지면 황토마을은 그 피난민 정착촌들 중에서 비교적 초기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그리고 부모와 선조를 기리고 그들의 향수를 달래려는 노력이 본향 황해도를 향한 망향탑과 실향민역사관을 건립하게 만들었는데, 그래서 고향과 부모를 그리워하는 실향민들의 발길을 멀리 제주도에서까지도 이곳으로 향하게 만들고 있다.

 

                     전북지역 피난민에 대해 설명하는 신귀백 익산근대문화연구소장

 

사실 익산시 관내에도 피난민 정착촌들이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태평양전쟁과 만주에서 돌아온 전재민을 위한 공간과 한국전쟁의 피난민을 위한 대표적인 공간으로 황등면의 정착마을이 있고, 마동의 신설지, 인화동의 창고촌 그리고 송학동의 농원 등도 있다. 아쉽지만 익산의 피난민촌 마을들은 9월에 답사할 예정이다. 

 

 

글쓴이: 최정호. 익산근대문화연구소 회원

왕궁면지 편찬위원, 여산면지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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