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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역 민중 함성이 기념탑에 스며들다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4-05-16 10: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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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 최초 익산역과 대중집회 장소


일본 제국주의는 이리(현 익산)에 쌀 수탈을 위한 식민지 지배 계획도시를 건설할 때 제일 먼저 이리역과 그 중심으로 호남선, 군산선 그리고 전라선 철도를 부설했다. 최초의 익산역은 일제강점기 1912년에 건립되었다. 당시에는 이리역으로 시작하였다. 첫 역사(驛舍)가 자리했던 곳은 4ㆍ19학생 의거 기념탑이 세워져 있던 안쪽 익산역 내에 있었다. 익산대로 16길의 정중앙에 있었고, 일제강점기 때 그 길을 일출정이라 불렀다. 그 후 역사는 1977년 이리역폭발사고가 발생하면서 현 위치로 옮겨져 왔다. 그 정면에 중앙로와 남북으로 익산대로가 새롭게 뚫렸다.


익산역 앞에는 광장이 있다. 우리나라 광장은 일제강점기에 철도역을 중심으로 조성됐다. 이 공간은 일제강점기부터 KTX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인 부침을 해왔다. 익산이 고향인 윤흥길 작가는 연작소설 <소라단 가는 길>에서 익산역 시대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시내에서 무슨 대회가 열렸다 하면 그 장소는 맡아놓고 역전 광장이었다. … 실상 역전 광장이 각종 대회 장소로 애용된 역사는 꽤나 오래되었다고 했다. 일제시대에도 이런저런 대회들이 뻔질나게 열렸었고, 해방 직후부터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의 그 혼란기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 인공 치하에서 걸핏하면 무슨 대회다, 무슨 대회다, 해서 인산인해를 이루곤 했던 역전 광장은 수복이 되자마자 또다시 엄청나게 바빠지기 시작했다. … 초등학교 2학년짜리 우리 조무래기들까지 뻔질나게 ‘걸구대’에 동원되어 전교생이 먼 길을 군대식으로 행진한 끝에 역전 광장에 집결하곤 했다”


소설 속의 익산역 역사를 유추할 수 있는 기념비가 다섯 개가 세워져 있다. 그 사건의 시대별로 기념비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도 역사적 기록이 될 수 있겠다. 다섯 개의 기념비는 공교롭게도 역 광장 북쪽에 집중돼 있다. 기념탑이 건립된 순서대로 탐방해 보자.


 # 4·19학생 의거 기념탑과 3·1 기념비


4,19학생 의거 기념탑

익산역 광장에 ‘4·19 학생 의거 기념탑’이 1963년 최초 세워졌다. 이 기념탑은 4·19로 숨지거나 다친 국민을 추모하기 위하여 전국 최초로 건립되었다. 기념탑 구조물은 원광대학교 배형식 교수가 제작하였고, 글씨는 익산 출신 고재봉 서예가가 썼다. 기념탑에는 한자로 ‘四一九學生義擧紀念塔’이라 새겨있고 다른 기념문은 없다. 매우 간단명료하다.


4·19학생 의거의 공식 명칭은 4·19혁명이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한 2·28 학생민주 의거와 3·15 부정선거 시위가 1960년 4월에 전국으로 확산하였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종식한 위대한 시민 혁명이다. 아시아권에서는 드물게 성공한 민주주의 혁명으로 평가된다. 

당시 익산에서도 1960년 4월 22일 남성중․고등학생 300여 명이 익산역 부근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어서 이리상업고등학교, 이리농업고등학교, 원광중학교 학생들이 가세하여 익산역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가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4·19혁명 기념사업회에서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다. 


두 번째로 ‘3·1 기념비’가 1971년에 세워졌다. 이 기념비는 익산 지역에서 전개된 3·1 독립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동아일보사가 익산 3·1운동기념비건립협찬회의 도움으로 1971년 8월 15일에 건립하였다. 익산역 광장 5개의 기념비 중 유일하게 국가보훈부에서 현충 시설로 지정하였다.


 ‘三一운동기념비’ 내용은 “1919년의 3·1만세는 한일합방에 항거하는 통분한 함성이요 자유와 독립을 되찾으려는 비장한 절규요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국권을 유지 계승하려는 당당한 주장이었다”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이 한 덩어리로 뭉쳐진 거대한 불길의 폭발이었다. 그러므로 삽시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에 번져 하늘이 뻐개지고 땅이 흔들릴듯한 맹렬한 기세였다. 이러한 정당한 평화적인 궐기에 대하여 왜적의 탄압은 어떠하였든가. 잔인하고 악동한 살육과 형벌이었다. 이해 4월 4일 우리 이리에서는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서정만 등 여러 의사가 장터에 모인 수만 명의 군중에 앞장서서 이 태극기의 물결을 지휘하던 중 무자비한 왜적의 총칼 아래 장렬한 순국의 영령이 되고 말았다.”라고 했다.


끝으로 “이 숭고한 3·1정신을 이어받아 창간한 동아일보사는 유서 깊은 이곳에 이 기념비를 세워 그 거룩한 정신을 만대의 후세까지 길이 받들어 드높이려 한다”라며 맺었다. 


# 1950년 미군의 이리폭격희생자 위령비와 익산 평화의 소녀상


1950년 미군의 이리폭격희생자 위령비

세 번째로 ‘1950년 미군의 이리폭격희생자 위령비’가 2000년에 세워졌다. 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당시 이리시에서는 1950년 7월 11일 동안 당시 이리역 부근 등에 미국 공군 B-29 중폭격기 두 기가 두 기가 이리역 일대를 1차로 폭격하였고 이리역과 인근 민가 여러 채가 파괴되었다. 1차 폭격이 끝나고 몇 분 후에 미군은 변전소와 전라선 주변에 2차 폭격을 가하였다. 이후 7월 15일에는 미군 전투기 네 기가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곳을 복구하던 사람들에게 다시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하였다.


기념비에는 ‘1950년 미군의 이리폭격 희생자 위령비’라 새겨놓았다. 비문 옆에는 “1950년 미군의 이리 폭격에 의해 무고하게 숨져가신 분들입니다”라며 94명 명단이 새겨있다. 그날의 생생한 모습이 <제4회 1950년 미군 이리폭격 희생자 추모제 자료집>에 기록되어 있다. 


“그 순간 익산역 일대를 선회하던 폭격기는 시커먼 무언인가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직원들과 민간인들은 낙하산이 떨어진다고 신기해하며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었다. … 곧이어 굉음과 함께 엄청난 화염이 이리역 일대를 삼켜버렸다. 미군 폭격기가 이리역 일대에 사재하여 작업 중이던 기관차는 물론 구내 시설에 대해서도 가공할 폭격을 가하였다”


2010년 6월 29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사건 발생 60년 만에 미군 전투기의 오폭으로 인한 피해로 결론을 내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기간시설 파괴 작전에 따른 의도된 폭격일 가능성도 있음을 명시하였다. 당시 사망자도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오폭인지 고의적인 폭격인지 의혹이 있는 만큼 정밀한 진상조사가 필요한 것 같다.


네 번째로 ‘익산 평화의 소녀상’이 2017년에 세워졌다. 기념물은 평화의 소녀상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건립선언문과 평화비로 나뉘어져 있다. 광복 71주년을 맞아 ‘익산 평화의 소녀상 건립 시민추진위원회’가 시민 주도로 후원금을 모금하여 건립하였다. 그 뜻을 담아 광복절에 제막식이 있었다. 


소녀상은 금동으로 제작하였고, 그 옆에 의자가 놓여있으며 왼손으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며, 26년간 다음과 같이 요구해 오고 있다”라는 비문을 꼭 잡고 있다. 그 우측 평화비에는 ‘익산 평화의 소녀상’이라 새겨져 있다.


“우리는 올바른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한반도 평화와 보편적 인권 가치를 지켜가고자 하는 익산시민들의 뜻을 모아 이곳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한다”라고 건립선언문이 시작한다. 또 하나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는 교훈을 되새기며 익산 평화의 소녀상을 미래 세대를 위한 올바른 역사 교육 현장으로 만들고 가꾸어 갈 것을 선언한다”고 했다. 끝으로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의하여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 참혹한 전쟁범죄의 희생양이 된 여성들의 인권과 명예 회복, 전쟁으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을 선언한다”라고 하였다. 


건립선언문 뒷면에는 ‘익산 평화 소녀상 건립 시민추진위원’ 700여 명의 성명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가족 추진위원에 우리 가족 4명도 눈에 띄었다. 당시 자녀들 돼지 저금통과 일부 금액을 보태어 후원금을 보냈었다. 


# 이리역폭발 희생자 추모탑과 미래 기념탑


이리역폭발 희생자 추모탑

다섯 번째로 ‘이리역폭발 희생자 추모탑’이 2020년에 세워졌다. 이 탑은 익산역 내에 있지만 숨바꼭질하듯이 꼭꼭 숨어있다. 다른 기념탑들이 광장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왜 이 탑만 외떨어져 있을까?


추모탑은 기차 모형을 직사각형의 3단 높이로 세웠다. 화강암 재질로 ‘이리역폭발 희생자 추모탑’이라 새겨 넣었다. 탑 좌우에 기차선로가 바나나 모형으로 받치고 있다. 정사각형의 기단에는 당시 폭발로 파괴된 도시 사진들이 필름처럼 펼쳐져 있다. 탑 뒤쪽에는 사망자인 철도공무원 16명과 시민 49명의 명단이 있다. 지금도 시민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로는 익산역 부근에 있던 사창가가 초토화되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주소 불분명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모르는 곳에 묻히면서 집계에서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옆에는 ‘재난의 길목에서’란 어느 시인의 글이 쓰여 있다. 다른 추모비는 모두 위원회가 있어 조성했다. 그러나 이 추모탑은 누가 왜 건립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우리나라 철도사상 최대의 참사로 무고한 시민들이 사망했는데 기념탑치고는 참으로 옹색하기 그지없다. 


이리역폭발사고는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에 발생하였다. ㈜한국화약에서 생산한 화약을 실은 화물열차가 이리역에서 대기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폭발 사고로 이어진 사건이다. 이날 저녁 우리나라와 이란의 월드컵 축구 예선전 경기가 오후 9시경부터 열렸고, 같은 시간에 삼남극장에서는 하춘화 쇼가 공연이 있었다. 정부는 이 사고로 사망자 59명, 중상 185명, 이재민 1,982세대 9,973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고 했다. 하지만 주변 사창가의 신원미상자를 포함하면 사망자는 훨씬 많았을 것이라고 전한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 이념을 계승한다.”라고 하였다. 익산역 광장 기념비에는 3·1운동, 4·19혁명 정신과 상흔의 흔적이 5개의 탑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오늘도 승객들이 기차를 타고자 그 옆을 바삐 걸어가고 있다. 그 탑 옆에 서 있자니 그날 시민들의 ‘대한독립만세’ ‘3ㆍ15부정선거 다시 하라’ ‘이승만은 하야하라’ 등 함성이 귓가에 쟁쟁하게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앞으로 어떤 기념탑이 세워질까? 고향역 노래비, 유라시아철도 시발 기념비 등…. 이 탑들을 세운 시민들이 합동기념식을 개최하는 모습을 즐겁게 상상해 본다.


 

글쓴이

채수훈 익산시 위생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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