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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가 발전하려면 시대에 맞춰 변해야 한다”
  • 윤찬영 객원기자 기자
  • 등록 2024-06-05 11:55:46
  • 수정 2024-06-05 12: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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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라한옥체험단지에서 산수연... 아들 조관우 등 축하
  • 다섯 살 때 소리 75년 외길, 판소리 매력 전세계에 알려

국창 조통달과 부인 그리고 조관우와 그의 두 아들

국창 조통달 선생의 산수연(80세 생일)이 지난 6월 2일 오후 4시 함라한옥체험단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는 국창의 산수연답게 여러 국악인들과 제자들 그리고 조통달 선생의 장남인 가수 조관우 씨를 비롯한 가족 등 많은 축하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풍성한 공연과 덕담으로 채워졌다.


식장에 들어서는 국창 조통달과 부인

조통달 선생은 그동안 풍부한 감성과 깊이 있는 표현력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면서 국창의 경지에 오른 소리꾼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수궁가 준보유자인 그는 많은 후진을 양성하면서 판소리의 보존과 전승에 큰 기여를 해온 것은 물론, 판소리의 현대적 해석과 확산에도 힘써왔다. 지금도 한국 전통음악의 가치와 매력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이날 그의 초등학생 제자들이 나와 직접 감사의 편지를 읽고 감사패를 전달하는가 하면, 윤미 함라한옥체험단지 대표를 비롯한 십여 명의 제자들이 함께 무대에 올라 축하 공연을 펼쳤다.

조통달 선생은 축하객들을 향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다섯 살 때 소리를 배워서 75년을 외길을 걸어왔다. 국악이 너무 천대받고, 국악 하는 사람들이 무시를 받아서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나라도 나서서 뭐라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창극단에 들어가 주인공도 하고, ‘얼쑤, 우리가락’이란 <전주엠비씨> 프로그램도 맡아 하면서 국악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힘써왔다”고 자신의 지난 생을 되짚었다.


제자들과 기념촬영

그는 우리나라 소리꾼으로는 처음으로 유럽 7개국 11개 도시를 돌면서 2시간30분짜리 <춘향가>를 완창한 이력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빛을 발해 판소리가 1964년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데 이어, 2003년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지금도 함라한옥체험단지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가 하면, 곧 무대에 올릴 새로운 창극에도 출연할 계획이라고 한다.


제자들과 기념촬영

이번 행사를 기획한 조통달 선생의 수제자이자 함라한옥체험단지 운영을 맡고 있는 윤미 ‘예술이꽃피우다’ 대표는 “조통달 선생님의 고향이자 국창 박초월 선생님이 계셨던 익산 함라한옥체험단지에 ‘우방 조통달 판소리 전수관’을 세우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윤 대표는 “과거 예술가들의 혼이 담긴 이곳에 전통예술의 뿌리를 더욱 굳건히 내리고 후학 양성과 문화예술 저변 확대에 힘을 쓰는 한편, 새로운 국악 창극과 뮤지컬로 익산 전통예술과 국악의 꽃을 피워 익산시민에게 예술의 가치를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미니 인터뷰] 조통달 선생,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조통달(趙通達) 선생은 여든 번째 생일을 맞은 소회를 묻자 “지난 인생은 잘 살았다”면서도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다. 예술의 길이 그만큼 멀고 험하다는 뜻이 담긴, 평소 그의 지론이다. 


조통달 선생은 일제강점기이던 1945년 6월 6일 당시 익산군 황등면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이모인 명창 박초월 선생으로부터 소리롤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적 뱃속에서부터 소리를 들어서인지 소리들을 흥얼흥얼 다 외웠고, 그래서 먼저 배운 제자들보다 더 잘했다”라고 했다.


“처음엔 집안에서 소리를 안 가르치려다가 주변에서 하도 재주가 있다며 가르치라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나한테 소리를 배우고 싶냐고 물어서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그럼 배우라고 하셨다. 그렇게 시작해서 13살 때 이승만 대통령 탄생기념 전국 명창대회에서 1등을 했다.”


‘통달’이라는 예명도 그의 어머니가 지어주셨는데, 기왕에 시작했으니 소리든 무용이든 악기든 모든 것들을 다 통달하란 뜻으로 지어주셨다고 한다.


여든 번째 생일을 맞은 소회를 묻자 그는 “지난 인생은 잘 살았다”고 자신있게 답했다.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 진행했던 <전주엠비씨>의 ‘얼쑤, 우리가락’에 대한 기억도 자랑스럽게 꺼냈는데, 그는 “당시엔 국가를 비판하면 잡혀들어가는 무서운 세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서 못 하겠다고 하길래 난 ‘죽일 테면 죽여보라’는 마음으로 프로그램을 맡았다. 조간신문이 나오면 작가가 그걸 보고 원고를 썼고, 난 그 자리에서 노랫말을 지어 불렀다. 출근길 아침방송이었는데 사람들이 다 조통달이 옳은 소리 잘 한다며 박수를 쳐줬고 그래서 인기가 많았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판소리뿐 아니라 국악이 세계로 나아가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국악이 조금 더 발전하려면 원칙만 가지고는 안 된다. 외국을 많이 다녀보면서 음악과 문화를 많이 접했는데, 시대에 맞춰서 국악과 판소리도 변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판소리의 원조, 산조의 원조, 무용 살풀이의 원조는 그대로 간직하되 거기다 새로운 걸 붙여서 발전을 시켜야 한다. 다행히 많이 나아지고 있다. 내가 살아있는 한은 국악이 발전하는 데 힘을 많이 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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