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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거울 이야기(1)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4-06-07 08:40:16
  • 수정 2024-06-07 09:3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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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산 사람도 잘 모르는 익산 이야기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 중인 국보 ‘전(傳) 논산 청동방울 일괄’ 중 팔주령 ⓒ최정호

지난 4월 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벚꽃 소식과 함께 반가운 뉴스가 보도되었다. 삼성박물관 리움에 있던 국보 ‘전(傳) 논산 청동방울 일괄(論山 靑銅鈴 一括)’이 부여박물관으로 이전된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사는 익산시에서 출토된 유물도 아니고, 더욱이 익산박물관이 아닌 부여박물관으로 온다는데 그게 왜 반가운 소식일까?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2008년 ‘문화재 제 자리 찾기’의 대표인 혜문 스님이 삼성박물관 리움을 방문한 이야기부터 언급해야 한다. 당시 혜문 스님은 삼성이 가평 현등사(懸燈寺)에 반환하기로 한 사리구(舍利具)를 보기 위해 리움을 방문했다가 국보 제146호의 명칭에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물에 대한 해설은 논산에서 출토되었다는데, 그 명칭이 ‘강원도 출토 일괄 유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혜문 스님은 “국보 146호의 명칭은 오류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에 명칭의 변경을 민원 제기했고, 민주당 손봉숙 의원의 소개로 국회에도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처럼 혜문 스님의 노력에 힘입어 문화재위원회는 2008년 2월 21일에 국보 146호의 명칭을 ‘청동방울 일괄’로 변경하기로 의결하고 변경 절차를 마무리했다. 


# 도굴과 밀매에서 바뀐 문화재 명칭


그러면 왜 국보 146호는 유물의 출토지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국보 지정을 신청한 금속유물 감식의 전문가 김○현 씨가 이 유물들의 출토지를 강원도 원주라고 진술했기 때문이었다. 이 유물들은 그때까지 알려진 동령류(銅鈴類: 청동방울들) 중에서 가장 문양이 정교하고 높은 수준의 기술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1972년 12월 22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국보 - 전 논산출토 청동방울 일괄, 이미지 원본 : 국가유산청 ⓒ최정호

당시 문화재위원회는 김○현 씨가 소유한 청동방울들을 ‘팔수형 동령(八手形銅鈴=팔주령)’은 국보 제146-1호로, ‘동조영부병두(銅造鈴附柄頭=간두령)’는 국보 제146-2호로, ‘동조환상쌍두령(銅造環狀雙頭鈴=조합식 쌍두령)’은 국보 제146-3호로, ‘동조영식초(銅造鈴飾鞘=쌍두령)’는 국보 제146-4호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출토지에 관해서 확실한 정보가 없었던 문화재위원회는 강원도에서 출토되었다는 김○현 씨의 진술에 따라 ‘강원도 출토 일괄 유물’로 명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단서 조항을 덧붙였다. 


“선사시대의 유물로서 출토지는 불분명하나 국보 제143호로 지정된 화순 대곡리 출토 청동유물에 비해 보존상태가 양호하므로 국보로 지정하되 추후 출토지를 밝히기로 노력한다”


2008년 3월 31일 KBS뉴스

그 후 1987년에 김○현 씨는 자신이 수집한 유물 400여 점을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에게 7억 원에 매각하였다. 국보 제146호로 지정된 유물 외에도 국보 제137호인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大邱 飛山洞 靑銅器 一括)’을 비롯한 국보 5점과 보물 제560호인 ‘청동 진솔선예백장 인장(靑銅 晋率善濊伯長 印章)’을 비롯한 보물 5점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김○현 씨가 이병철 회장에게 매각한 유물들은 호암박물관을 거쳐 나중에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게 되었는데 이곳을 방문한 혜문 스님이 문화재 명칭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이 2021년 4월 28일 국립익산박물관에서 다뉴정문경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최정호

그런데 당시는 문화재청 역시 국보 제146호의 출토지가 강원도가 아닌 충청남도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밝혀진 것은 처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김○현 씨의 고백 덕분이었다. 김○현 씨는 국보로 지정된 후 한참이 지나서야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한병삼(韓炳三, 1935~2001) 교수에게 ‘국보 제146호의 출토지는 강원도 원주가 아니고, 충청남도 논산훈련소 부근의 야산에서 참호를 파던 군인들에 의해 발견된 것이며, 그 당시 국보 제141호인 국보경(國寶鏡=다뉴세문경)도 함께 출토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한병삼 전 관장에게 김○현 씨의 고백을 전해들은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도 “대형 청동거울과 청동방울 세트의 조합이 자연스럽다. 게다가 청동방울에서 보이는 검은 녹의 색깔이 청동거울인 정문경과 극히 유사하다”며 김○현 씨의 고백이 사실이라는 견해를 표했다. 또한 1971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청동유물의 출토지와 매장유구가 확인된 것도 김○현 씨의 고백이 기정사실이라는 것을 이미 지지해주고 있었다. 


사진설명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和順 大谷里 靑銅器 一括) [이미지 원본 : 위키피디아] ⓒ최정호

그리고 이런 내용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1991년에 발표한 자료를 비롯한 여러 학술조사에서 인용되었다. 그 내용이 2008년 제5회 매산기념강좌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연구〉 자료집에 수록된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의 논문 「다뉴정문경에 대하여」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숭실대 국보경은 최초에는 출토지가 전(傳) 강원도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동경은 역시 전(傳) 강원도 출토로 전하던 국보 제146호인 리움박물관 소장 ‘강원도 출토 청동방울 일괄’과 함께 충청남도 논산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한다. 전(前) 국립중앙박물관장 고(故) 한병삼 선생의 생전 전언에 의하면 이 청동기 일괄유물은 논산훈련소에서 참호를 파다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군인들이 중간상인에 팔아넘기면서 강원도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둔갑되었다고 한다. 이 유물을 구입해 팔아넘긴 중간상인이 후에 고 한 관장께 고백하였는데 거울은 숭실대학교에 넘겼고 나머지 청동방울 일괄은 수집가 고 김동현 씨에 팔았는데 이후 청동방울 일괄은 다시 호암(현 리움)박물관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중략) 중간상인의 말을 100%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20년 이상이 지나 고백한 것이고 유물 세트의 정황상 숭실대 국보경과 국보 제146호 청동방울들이 일괄유물일 가능성은 높다 하겠다. 후에 과학적 분석이 가능하다면 이에 대한 진부가 가려질 수 있겠다.


#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거울’ 정문경(精文鏡) 제작의 수수께끼


정문경, 이미지 원본 : 국가유산청 ⓒ최정호

김○현 씨의 고백 덕분에 새로운 사실이 하나 더 밝혀졌다. ‘국보경(國寶鏡)’이라는 별칭을 가진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정문경)이 국보 제146호 청동방울들과 함께 출토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국보경’이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유물은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면서부터 바로 ‘국보 중의 국보’로 통했다. 국내 최대의 크기이기도 했지만 2300년 전의 기술로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게 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정문경(精文鏡)은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거울’이라는 뜻으로 ‘잔무늬 거울’이라고도 하며, 고리(鈕)가 여러 개이고 세밀한 무늬(細文)가 있다 하여 다뉴세문경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얼마나 정교하게 제작되었기에 ‘국보 중의 국보’로 통하게 되었을까? 

이 정문경은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로 진입하는 시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4~2세기 경에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울의 지름은 212~218㎜, 잔존 무게는 1590g 정도이다. 그런데 이 정문경에는 동심원을 반복해서 그린 뒤 그 동심원 안에 무늬를 새겨넣었고, 규칙적인 직선을 새긴 삼각문양 등이 매우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정문경에 새겨진 선은 무려 13,300여 개에 달하는데, 그 선의 간격은 0.3~0.34㎜, 원의 간격은 0.33~0.55㎜에 불과하다. 그래서 숭실대학교에서 이 정문경을 재현해내기 위한 도면을 그리는 데만 약 10개월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도면을 제작한 후에도 이 정문경을 재현할 방법이 없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이 밝혀낸 정문경의 제작 방법은 ‘주물사 제조법(점토분이 많고 입자가 미세한 모래로 거푸집을 만드는 방법)’이었는데, 오랜 연구 끝에 활석 거푸집을 사용한 밀랍주조법으로 재현에 성공한 장인은 있었지만, 원래 방법으로는 아직 그 누구도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 한반도 최초의 벼농사 시배지(始培地), 마전리 유적


1999년 11월 4일 MBC뉴스

하지만 독자들 중에는 이렇게 놀라운 청동기 제작 기술이 정말 우리 선조들의 것이었는지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정교한 청동거울을 보유하거나 제작할 수 있는 집단이라면 적어도 부족국가 이상의 강력하고 안정된 사회적 기반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 기록이나 발표된 연구 결과는 논산훈련소 인근에 그처럼 고도로 발달된 선진 문명 집단이 있었다는 내용이 없다. 


마전리 해피북스, 이미지 출처 : 신나는 교과서 체험학습 ⓒ해피북스

그런데 1999년 논산훈련소에서 약 3Km 이내 거리의 지역에서 ‘천안-논산 고속도로’가 지나갈 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를 하던 중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곳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생활 유적, 분묘 유적, 생산 유적이 일정한 권역에서 확인되었는데,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목조우물’이 발견되었다. 약 2500년 전에 만든 이 우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우물’이기도 한데, 수로ㆍ보(洑) 등과 함께 저수장 및 저목장의 흔적이 나오면서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논농사(벼농사) 유적지’ 중 하나라는 것이 밝혀졌다. 여기서 한반도 최초의 논농사 유적지라는 말은 바로 이곳이 당시에 한반도 최고의 선진 문명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가 밭농사에서 논농사로 옮겨가는 과정은 당시로서는 산업혁명과 같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최초의 논농사 지역 중 하나인 마전리유적지는 정문경과 청동방울들이 출토된 논산훈련소 인근에서 도보로 1시간 이내의 거리에 있다. 그러므로 두 유적지는 당연히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벼농사의 성공으로 얻게 된 경제적 여력이 축적되면서,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거울의 제작을 가능하게 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다음 호에 2편 이어짐)


글쓴이 

최정호<익산근대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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